약속 장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우연히 본 간판에 since2020이라는 문구가 붉게 빛난다. 분식을 파는 식당이라 가게 전면에 빨간색이 유독 많았는데 간판도 역시 잘 어울렸다. 다만 간판 구석의 숫자를 보다가 음식점이 올해부터 영업한다는 걸 굳이 내세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식당을 조금 지나쳐 로터리에 신호 대기로 정차하던 중, 이 근처에 꼭 한번 가보라며 친구가 추천해준 평양냉면집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꽤 오래된 가게였고 북한에서 온 주방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상호가 가물가물하다. 연일 이어지던 장맛비 사이로 맑게 갠 오늘, 평양냉면 육수 생각에 잠시 입맛을 다셨다.
사업도 식당도 때로는 인간관계까지도, 긴 시간과 역사를 내세우는 것을 우리는 더 자주 겪는다. 우정과 와인은 오래 묵힐수록 좋다는 말도 종종 하지 않던가. 짧게 유지되는 관계나 그 시간 자체를 낮춰 말하는 표현들도 금세 열 손가락을 넘게 떠올릴 수 있다.오랜 시간 살아남는 회사가, 식당이, 관계가 되는 것이 그 깊이와 단단함을 얼마나 잘 보여주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나는 올해를 새겨 넣은 그 간판이 싫지 않았다. 아니 매력을 느꼈다.
'그래, 오래되고 잘 나가는 식당들도 오픈 첫 해가 있었고 개업 첫날이 있었으니까. 저 식당이 대를 이어 계속될지 지금은 누구도 모르는 거니까.' 하는 마음으로 어느새 나는 그 식당을 대변하고 있었다.저 숫자가 길을 걷는 다른 이들에게도 의미를 발휘할 수 있을 때, 2020년이 까마득한 과거가 되는 날까지 자리를 지키겠다는 의지는 아니었을까. 물론, 당사자는 별 의미 없이 새긴 문구일 수도 있지만.
퇴근길에 그저 지나다 본 간판에서 시작한 생각의 흐름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진다. 어쩌면 새 회사에 합류한 지 만 두 달, 나의 이 짧지만 농도 짙은 시간을 남들이 희석하지 못하게 하려는 혼자만의 방어일 수도 있겠다.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지루하지 않게 채워준 자문자답을 이끈 그 아홉 글자를 다시 보고 싶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지도를 보지 않고도 찾아갈 수 있는 큰 로터리 옆 식당이지만 지금은 가고 싶지 않다. 몇 년이 지나 내가 이런 생각을 했고 글을 썼다는 사실까지 잊었을 때, 어쩌면 이런 힌트만으로는 장소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기억이 흐려졌을 때 우연히 길을 걷다가 발견하면 좋겠다.
긴 역사의 가치는 까마득한 언젠가 있었던 시작에 빚이 있다. 과거 어느 때에 시작했던 일들이 (계속 이어졌든 아니든)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듯, 이제 막 시도하는 일들이 미래의 나를 채울 것이다. 그런 낯설고 어설픈 시작들이 없다면 미래의 내가 오늘의 나와 과연 얼마나 다를까.
지금 망설이고 있는 그 시도가 내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삶을 바꾼 내 역사의 분기점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말 두려워야 할 것은 어설프고 부족한 결과물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나가는 시간이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