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셧다운
이상무 작가님의 글 '임사체험'을 얼마 전에 읽어서 그런가, 생각난 기억.
마음의 무의식적 방어 기제처럼, 몸도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전원을 꺼 버릴 때가 있다. 전기 사용이 과다하면 퓨즈가 나가버리듯. 아, 자율신경계 같은 생체 작용은 그대로고 의식의 전원만 꺼지는 것이니 결국 정신적 작용인가...?-_-? ...몸과 마음은 어차피 이어져 있으니까...
각설하고,
드라마 같은 걸 보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마주한 사람이 실신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나. 예전엔 심정은 알겠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건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그 스트레스를 헤쳐나가려면 무엇보다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나, 라는 서바이벌 의식 때문인가.
짐작하건대, ‘(도저히 대항할 수조차 없는 것이 나를 공격하려고 내 눈 앞에 섰으니)아, 나는 이제 죽었다. 고통을 느끼기 전에 차라리 의식을 꺼 버리자 / (내 인생의 전부와 같던 것을 잃어버려서)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으니 이 순간 자체를 거부하겠다 / 이 부닥친 현실을 어떻게 풀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으니 차라리 그냥 죽고 싶다’ 같은 느낌에 압도당하면 기절을 하기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돌아보니, 나도 기절한 적이 있었다. 6살(만 다섯!) 유치원생 때.
어른 키만 했던 건지 그보다 높았던 건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 키보다는 훨씬 높던 신발장에 신발을 까불면서 넣다가 장이 내 쪽으로 넘어져서 그 밑에 깔리던 순간이었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큰 물체가 수많은 흰색 실내화들을 뱉어내며 나를 덮치는데,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는(그리고 내가 이제 어떻게 될지 가늠이 안 된다는-어떤 일을 겪을 때 죽거나 살아남거나 어디를 얼마나 다칠지에 대한 분별이 서지 않았을 때였으니-) 깨달음과, 방정맞게 촐랑대면서 실내화를 넣었던 것에 대한 후회를 하며 순간 정신을 잃었다.
당시엔 창피하고 혼날까 봐 바로 얘기하진 못했는데, 신을 벗어서 손으로 넣지 않고 반쯤 벗은 발 한쪽을 디밀어서 장 선반 위를 탁탁 굴리며 벗었던 것이다. 신발에 손을 대기 싫다고 쓸데없이 깔끔 떨다가 온몸에 다발로 처맞는 역사를 겪었다. *-_-*;;;조그만 애가 그러는 정도로 신발장이 넘어졌다면 불안정한 장을 설치한 유치원이 먼저 실수한 것이기는 하지만(유치원 쌤들 식겁하셨을 듯), 설마 누가 그렇게 신을 벗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안 하셨겠지. 디테일하게 기억하는 걸 보니 나도 꽤 놀랐었나 보다. 신발장이 무례한 아이에게 화를 냈던 건지도... 하핳
천주교 유치원이었는데, 입구에 서 있던 상냥해 보이는 하얀 성모 마리아 상을 무척 좋아했다. 울 엄마는 정글-동물원이 아니라-의 사자 어머니였으므로. 기절하던 순간에 하얀 빛과 예수님이나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보였으면 좋았으련만. 그냥 블랙아웃이었다. 가족 중 크리스천은 아직 아무도 없었는데 제일 가까운 유치원이 거기라서 보냈을 뿐이었기 때문인가ㅎ
아무튼 눈을 떴을 때는 교무실의 푹신한 소파 위였고 양 콧구멍에 휴지가 처박혀 있었다. 쌍코피가 터지는 진귀한 장면을 놓친 것이 좀 아쉽다는 생각부터 들었던 걸 보면 사태의 심각성 따위는 모르는 철부지 어린애가 맞았다.
나중에 듣기를, 그 전날 밤에 엄마가 꿈을 꿨는데, 내가 신발을 한 짝 잃어버려서 그걸 찾느라 고생하셨다고 했다. 엄마는 꿈이 꽤 들어맞는 편이라서 불길한 마음에 유치원 끝나면 밖에 나가 놀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고도 하셨는데, 유치원에서 일이 터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자면서 열이 40도 가까이 올랐는데, 엄마는 꿈에서 신발을 끝내 찾지 못했다면 죽든지 잘못됐을 거라고 하셨다. 마치 내가 무사했던 건 자신이 신발을 찾아 준 덕이라는 듯. (Thanx mom-_-)
그 신발장은 육중하지는 않고 최소한의 두께들로 이루어진 나무 소재였던 데다가(아마 따로 운동을 안 하는 평균 성인 여성 혼자서 어렵지 않게 일으켜 세울 수 있을 정도), 일단 깔린 애가 코피만 터지고 멀쩡해 보이니 그랬겠지만, 아무도 날 병원에 데려가지는 않았다. 아직 야들야들한 꼬마였건만. -_-;; 그래서 내 코가 납작한가 보다.
참고로 울 엄마는 ‘피가 (밖으로) 터지면 괜찮은 것이고 안 터지면 (내출혈일 수 있어서) 오히려 위험하다’는 낭설을 꽤 믿으신다. (근데 피가 안 터져도 멀쩡해 보이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 생각하시니, 그냥 병원 가기 귀찮은 핑계를 그리 대시는 것 같다.) 그런 케이스들도 물론 있겠지만 모든 경우에 적용시킬 수는 없으니, 번거롭더라도 웬만하면 사고가 났을 때는 가능한 진찰을 받자. 손 쓸 수 없게 된 후에 더 비싼 약방문 쓰지 말고.
사실, 나는 '시간 됐으니 자야지' 하고 눕는 경우가 별로 없다. 방전될 때까지 깨어 있으려고 하는 날이 대부분이라, 잠들 때도 어째 기절에 가까운 것 같긴 하다. 억지로 자려고 한 적이 거의 없어서 그런가 불면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다만 신체가 수평이 되면 스르륵 잠들 때가 많기 때문에, 오히려 엎드려서 뭘 마음 놓고 못 하는 건 아쉽다(내 몸이 아무래도 '이 인간은 좀처럼 수면을 취하려 하질 않으니 기회가 되면 무조건 잡아서 기절시켜야 한다'고 상시 대기 중인 것 같다). 잘 때가 됐는데 잠이 안 오면 '횡재했다' 싶달까...학교나 직장 다닐 땐 더 깨어 있고 싶어도 최소한의 컨디션 유지를 위해서 마지못해 누워야 하는 게 아쉬울 때가 종종 있었다(말은 이렇게 해도 머리를 대는 순간 꿀잠 직행). 뼛속부터 프리랜서 체질인 듯.
표지: 2009년작
2025.08.08 추가: 지난 겨울에 읽은 <애프터 라이프>도 흥미진진했다. 신기한 사례가 많이 소개되기도 했고, 저자가 심리학을 전공한 후에 정신과의가 된 사람이라서 개인적으로는 더 술술 읽힌 것 같다. 심리학적 연구나 정신의학적 화제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 읽기에도 무난하게 쓰였지만, 중간중간 방법론적인 설명이 나올 때는 살짝 지루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그 외의 내용만으로도 압도적으로 흥미롭다. 임사체험에 관한 입문서로 충분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