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신경실조증의 발생 단계별 특징
결혼 2년 차 무렵부터 나는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큰 다툼이 있던 때는 아니었다. 오히려 눈물이 잘 나오지 않을 만큼 감정이 마른 상태에 가까웠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기의 나는 감정적으로 깊은 외로움과 고립을 겪고 있었다. 그 순간의 유서는 죽음을 향한 선택이라기보다, 스스로의 상태를 기록하려는 신호에 가까웠다.
이쯤부터 나는 전남편에 대한 기대감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짜증을 자주 드러냈고, 내가 한마디를 보태면 감정이 더 격해지거나 침묵으로 돌아서곤 했다. 그는 먼저 두서없이 앞뒤 말을 잘라 말해놓고 내게 말귀를 못알아 듣는다며 짜증을 내곤했다.
전남편은 그가 먹고 싶다는 비싼 음식을 먹겠다고 하지 않으면 어린아이처럼 토라졌다. 그 당시 나는 돈을 아껴야된다고 생각했기에 먹고 싶었지만 다른걸 먹자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그는 매번 1시간 넘게 주변을 빙빙 돌며 시간을 끌었고, 결국 내가 싫어할 만한 음식으로 식사가 이어졌다.
그는 언제나 내 선택을 먼저 물었지만, 그가 원하는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내 선택보다 그의 원하는 선택을 우선하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아껴 써도 그는 결국 하고 싶은 것과 먹고 싶은 걸 선택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무슨일이든 점점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는 옷과 양말을 뒤집힌 채 바닥에 아무 곳에나 벗어두는 것이 일상이었고, 배달 음식을 혼자 먹은 뒤 정리정돈을 하지 않아 치우는 일은 내 몫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살림에 서툰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눈치가 없던 나는 한참 뒤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
이런 사소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남편이 아닌 아들을 돌보는 심정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전시어머니가 신혼초 했던 '한번 살아봐'라는 말이 떠올라, 그 말의 무게를 새삼 알 것 같기도 했다.
첫돌을 앞둔 아기가 크게 아팠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거의 매달 응급실을 찾았다. 내가 아이와 함께 병실에 머무는 동안, 그는 어디서 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때부터 외박이 시작되었던 걸까. 이제야 지난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지는 기분이다.
어느날 그는 싸웠다고 헌팅 주점에 갔다가 들키기도 했다. 그래도 춤만 추러 갔었다는 그의 말을, 바보 같았던 나는 믿었다. 그때 그는 힘들게 일하고, 신나게 놀고를 반복하고 있었고, 증거도 철저히 숨겨둔 상태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럼에도 이때의 나는 가족과 행복해지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단란하게 저녁 식사를 하는 사소한 순간이 나의 작은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친구와의 저녁 약속을 못가게 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상한 표정을 지었고, '화났어'라고 묻는 내 질문에 '아니야'라고 답하며 혼자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와 아기는 투명인간처럼 느껴졌고, 결국 나는 그의 외출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의 외박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외박문제는 다툼의 주된 주제가 되었다.
그는 남들의 가정사에 관심이 많아보였다. 정작 본인의 가정은 돌보지 않으면서. 외롭고 힘들다고 말하는 나의 말은 들은척 하지 않은채 이혼을 고민중이라는 친구의 사정을 들어주기 위해 술약속을 나갔고, 친척과 논다고 알리바이를 만든후 외박을 하고, 친한형이 찜질방을 싫어해서 모텔에 같이 가서 잔다고 하기도 하고, 정말 가지각색의 외박 사유가 있었다. 주 5일을 술을 마시고 주 3~4일이 외박이었다.
그는 술먹고 출근을 늦게 할 때가 많았는데 나와 아기가 아플땐 재빨리 출근을 했다. 그러다 아기가 심각하게 아파서 응급실을 같이 가게될 때면 다음날 출근해야되는데 라며 짜증을 내곤 했다.
그 때는 차가 한대뿐이 없는 상황이었고 그가 출근해야 되는 상황이었기에 어쩔수 없이 같이 응급실을 가야 되는 때였다. 그에게 술마시고 늦게 출근한적도 많으면서 이 상황에서 짜증내는건 아닌거 같다고 말하면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날부터는 그가 집에 있는 날이면 자라고 하고 혼자서 응급실을 갔다왔다.
내가 아침밥을 차려준 날 그는 외박을 했고, 브런치를 챙겨준 날은 술먹고 늦게 들어오고, 그래도 다음날 꿀물을 타서 챙겨주면 기력을 회복해서 인지 또 술을 마시러 갔다.
나는 그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안해본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초보아내이자 초보엄마였던 나의 서툰 방법들은 그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었다. 한마디로 달래도 보고, 싸워도 보고, 돈도 줘보고, 원하는걸 해주기도 했지만 그 때 뿐이었다.
결혼기간 내에 못해본 방법은 시댁에게 그의 잘못을 말하는 것 뿐이었다. 이혼 후에야 시댁에서 일부 알게되었지만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도 그분들의 행동을 보면 진작 말했다고 해서 더 달라질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본인이 원하는 것이 그 순간에 충족되지 않으면 바로 토라지고 기분 나쁜 표정으로 하루종일 나의 피를 말렸었다. 나는 그의 침묵이 너무나도 싫었다.
내가 첫아이 육아로 힘들어할 때 일주일에 한번도 나와 아기를 위해 시간을 내주지 않았었다. 그는 항상 피곤해 했기에 집에 있거나 마트가는게 대부분이었다.
그의 잦은 음주와 담배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외박은 일상이 되어갔고 나와 아기는 내버려둔채, 그는 친척을 챙기고 지인들을 챙기고 철저히 주변사람을 챙기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는 밖에서 기분이 안좋은일이 있으면 나를 기분 안좋게 만들었고 울리곤 했다. 반대로 기분이 좋을 땐 들뜬 목소리로 술 약속이 있어 늦는다고 했다.
그러던 중, 또다시 여자 문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생겼다. 이혼을 하네 마네 하며 한바탕 소란이 있었지만, 나는 결국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속고 말았다.
외박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아냈지만, 그 약속은 오래가지 않았다. 거짓말은 반복되었고, 다짐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혼 3년차,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나의 마음은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를 반복하다가 점점 무뎌져갔다.
자율신경실조증은 갑자기 '툭' 생기는 병이 아니고, 대게 발생되는 진행 단계에 따라 공통적인 흐름이 반복되는 것 같다. 자율신경실조증이 생기는 전체 흐름을 내가 실제로 겪는 단계로 정리해보았다.
(※ 전문의가 아닌 개인적 정리이며, 의학적 진단 기준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0단계ㅣ정상 스트레스 반응
스트레스 받으면 긴장 되고, 쉬면 회복되는 단계로 수면, 식욕, 욕구 등이 유지 된다.
즉, 문제 없는 상태이다.
1단계ㅣ경고 단계 [초기 불균형 단계]
피로가 쉽게 쌓이고, 예전보다 예민하거나 무감각, 이유 없이 집에 있고 싶거나 외출 등 사람 만남이 귀찮아지는 단계이다.
'에너지가 줄어든 느낌'으로 미세하게 자율신경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할 수 있는 간계로 아직 발병 조건을 갖추기 전 상태이다.
즉, 피곤하지만 하고 싶으면 할 수 있고, 약속전엔 귀찮아도 나가면 괜찮아지는 상태로 잠깐 흔들리는 정도다.
2단계ㅣ자율신경 경계 단계
자율신경이 ‘버티는 모드’로 고정되어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기 시작한 상태이다. 이 단계는 감정에 대한 기대가 축소되고, 외부 욕구가 저하되고, 안전한 공간인 집에만 머물고 싶어한다.
뭘 하고 싶은지 스스로 모르겠다고 생각이 지배적이고 새로운 자극을 부담스럽게 받아들이고 결정하기 싫어하고 그냥 가만히 있고 싶고 싶어하는 단계다.
즉, 취향이 흐려지고 선택이 피곤하고 감정이 평평해지고 무덤덤하다.
3단계ㅣ불균형 고착 발병 직전 단계
회복이 잘 안 되고 자도 개운하지 않고 이유 없는 불안감이 있고 소화, 심장, 호흡 이상이 생기고 수면 리듬 깨지는 증상이 종종 발생된다. 매일 지속적이진 않아서 진단이 나오진 않는 상태다.
4단계ㅣ자율신경실조증 발병 단계
스스로 심장박동을 불편하게 느끼는 심계항진 증상이 수시로 발현된다. 이러다 죽는걸까 라는 약간의 두려움이 드는 공황 유사 증상이 생기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 손발 떨림, 과호흡, 가슴 답답, 소화기 장애 등이 발생된다.
즉, 매일 몸과 마음이 예측 불가능한 상태로 일상생활에 영향이 생기는 단계다.
나는 4단계를 6개월 넘게 지속하다가 1~4단계가 왔다 갔다 하며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상태이다. 현상태는 흉통에 익숙해진 상태로 몸과 마음이 흉통의 불편함을 기본값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 현재 내 상태는 심장 통증에 적응이 된 상태여서 아직 진짜 회복은 아니고 큰 스트레스가 오면 또 다시 무너질수 있는 위험이 있는 단계로 느껴진다.
사실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경증우울감 정도였고 흉통만 극심 했고 죽음은 떨쳐버린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마음은 가끔씩 오락가락한다.
괜찮은 날도 있고, 불안이 스며드는 날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