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선미, 그림: 김민기
“뭐 해 먹고 살지 엄마?"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잖아?"
“응."
"그냥 살아. 살다 보면 어느 날 해보고 싶은 게 생겨. 뭘 벌써 걱정이야."
"그래? 이미 결정했어야 할 나이 아닌가?"
"우리 딸 인생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네. 살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생겨요. 그중에 우리 딸이 고민하는 답도 갑자기 툭 튀어나온다. 억지로 찾는다고 찾아지지 않아. 그냥 살아."
엄마 말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인생을 우습게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대단하게 생각해서 머리가 아프다.
앞으로 뭐 해 먹고 살까는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온 난제다.
일을 하자마자 느꼈다.
'아 넋놓고 그냥 살다가는 나중에 벌어먹고 살기 힘들겠구나.'
TV, YouTube, 책에 나오는 잘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잘하는 일도, 하고 싶은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머리를 박고 골몰해봐도 무엇에 흥미가 있는지, 뭘 잘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취미, 특기, 장래희망을 적으라고 했던 거 같은데 나는 가방만 옮기고 다녔나 보다.
아! 잘하는 게 있긴 하다. 물론 벌어먹는데 아무 쓸모가 없다. 이를테면 내용 없이 말장난만 2시간 하기라든가, 별거 아닌 거에도 쉽게 웃기라든가, 느리지만 밥 끝까지 다 먹기. 뭐 이런 거.
저따위 아이템들로는 100년짜리 여로를 버텨낼 수 없다. 필살기 찾기도 어려운데, 필살기를 휘두를 무대도 찾아야 한다. 무대에 오르는 시기도 적절해야 한다. 인생은 이렇게 어려운 거다. 대책 없이 그냥 살다가는 벌어먹기는커녕 빌어먹기도 힘들다.
그런데 내가 놓친 게 하나 있다. 만 날을 똑같이 살아도 우리 주변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흘러간다.
평소 같은 출근길 남북 종전 선언 한마디에 무기회사 사장님이 울상이 되기도 하고, 기십 시간 머리를 싸매도 안 나오던 해답이 옆에 사람 하나만 앉혀도 팡파르가 터질 때가 있다. 대타로 시작한 강연이 인생 제2막을 열기도 한다.
갑자를 한 바퀴 돌아보는 나이에 가까워지면 달리 보이는 게 있나 보다.
엄마 말이 맞다. 나는 인생을 하잘것없이 봤다. 세상살이의 가장 큰 변수가 나인 줄로만 알았다. 이대로 살면 이대로만 살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인생은 내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도록 그냥 두지 않는다. 어제와 다르게 살게할 유혹거리를 지천에 널어놓는다.
살다 보면 녀석이 뿌려놓은 떡밥중 한 덩이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날이 온다.
그냥 살자.
나는 오늘 엄마의 말을 물었다.
* 일기(日气)는 매주 한편씩 헿요일에 올라옵니다.
* 김민기님의 그림은 http://instagram.com/kimminkiki/ 에서 더 다양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