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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앝 Dec 30. 2018

식물을 키우는 데도 나이 제한이 있다

글: 김선미, 그림: 김민기

 영화에 '미성년자 관람 불가' 같은 연령 등급이 있다면, 식물을 키우는 데도 나이 제한이 있다. 꽃집에서는 식물을 팔 때 손님에게 몇 살인지 물어봐야 한다. 출처는 없다. 그냥 내 생각이다.

 일하기 싫던 어느 날 허리나 세울 겸 산책을 나섰다. 산책이라 해보았자 회사 바로 아래 있는 서울스퀘어였다. 미생에서 장그래가 다니던 그 건물. 근무시간중 서울스퀘어 지하상가에는 나 같은 직장인들이 꼭 하나둘 있었는데, 그들이 하는 일은 비슷했다. 상가 안을 한 바퀴 슥 돌다가 사지도 않을 거면서 상점 안을 기웃기웃. 평소라면 옷가게에 갔을 텐데, 그날은 왜인지 발끝이 꽃집에 닿았다.

 거기서 운명처럼 카우보이를 만났다. 양팔을 하늘 높이 쳐든 늠름한 자태. 4cm 정도의 적당한 키. 매장 안을 빼곡히 채운 작은 사막들 사이에서도 묵직한 존재감을 뽐냈다. 그 모습이 서부영화에서 봤던 선인장과 비슷해서 결제하기도 전에 카우보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꽃집 아가씨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물을 줘도 잘 자랄 거라고 했다.

 카우보이는 내가 주는 물을 두 방 맞고 쓰러졌다. 최고로 키우기 쉬운 식물이랬는데 수명이 고작 물주기 2회라니. 황량한 사무실에서 의지하고 대화할 상대라고는 너 하나였는데. 급하게 마음을 쏟았던 나는 화분 하나를 진짜 사막으로 만들고서 이상하리만치 크게 서글퍼했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거라고, 이별의 아픔이 겨웠던 나는 카우보이가 서 있던 자리에 금세 바질을 옮겨 심었다. 잘 키워서 페스토를 만들어 요리에 쓸 거라며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물론 그 역시도 얼마 가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릴 때부터 식물 욕심이 많았다. 식물원에 갈 때나 여행지에서 세 개씩 엮인 화분세트를 꼭 사 들고 오는 어린이였다. 동시에 식물의 급소를 잘 아는 살식자였다. 내 손이 닿을 때마다 초록은 쪼그라들거나, 무르거나, 말라비틀어지거나, 누렇게 뜨거나 갖가지 형태로 처참하게 죽어 나갔다. 어느 시인의 고백이 남 일 같지 않았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황지우, <뼈아픈 후회> 中

 이 모든 게 서른 살 까지다. 서른 하나 올해 여름, 잎을 다 떨구던 애플민트가 고개를 바짝 들었다. 이 겨울에도 선물로 받은 2개의 다육이, 직접 식재한 선인장이 연둣빛 새 살을 드러낸다.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온다. 메마른 땅에도 생명력을 불어넣는 가이아 김선미. 고작 나이 한 살 먹었을 뿐인데, 요술처럼 나는 대지의 여신이 되었다.

 물 주는 주기나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흙의 상태에 따라 비를 담뿍 내리기도, 목을 축일 정도만 살짝 적셔주기도 하는 거였다. 건조한 날엔 평소보다 자주, 습한 날엔 드물게 눈길을 주는 거였다. 일구는 땅을 살피지 못하고, 그저 내가 보고 싶을 때 얼굴을 불쑥 내밀고 내가 주고 싶은 만큼 멋대로 물을 쏟아붓던 지난 30년이 스쳤다. 내 일방적인 관계 방식에 절름발이가 됐던 풀과 사람들이 생각났다.

 꼭 필요한 만큼만 물 주는 방법을 배우는 데는 3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다보면 전에 없던 능력이 생겨난다.


새해다.

나이가 자란다.




* 구독자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휴대전화 배경화면을 공유합니다. 올해 일기를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새해에도 일기는 계속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일기(日气)는 매주 한편씩 헿요일에 올라옵니다.
* 김민기님의 그림은  http://instagram.com/kimminkiki/에서 더 다양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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