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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앝 Mar 17. 2019

오전 6시, 속이 꽉 찬 보스턴백을 뒤지는 여자

글: 김선미, 그림: 김민기

 오전 6시, 어울리지 않는 옷가지들을 겹겹이 껴입고 쪼그려 앉아 속이 꽉 찬 보스턴백을 뒤적이는 한 여성이 있다. 그 옆, 3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형광빛 여름 운동복 위에 검정 코트를 걸치고 갈색 신사용 구두를 신었다. 둘의 차림새가 기이하다.

 반대편에 또 다른 남녀가 나란히 서 있다. 하얀 털이 솜뭉치 같은 고양이를 안고 하늘을 바라보는 여자. 강아지가 앉아있는 이동장을 들고 눈을 비비는 남자. 서로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는 모습으로 보아 둘은 모르는 사이다. 개가 짖는다. 남자는 이동장을 톡톡 치며 조용히 개를 달랜다.

 "꽁치, 그만! 괜찮아."

 이른 아침임에도 외출할 때처럼 잘 차려입은 신사, 숙녀도 있다. 하지만 상당수는 외투만 겨우 여미고 겨드랑이에 양손을 끼운 채 발을 동동 인다. 아 추워. 겉옷도 없이 홑겹 실내복에 짝짝이 신을 신고 오돌오돌 떠는 이의 수도 제법 된다. 수십 명이 모였음에도 대화 한 마디 없다.

 기다리는 이가 오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이 서로를 의식하며 하나둘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양쪽 어깨에 이민 가방을 바리바리 채우고 뒤늦게 헐레벌떡 계단을 내려오던 남자는 엘리베이터 앞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그 뒤를 따르던 사람들도 이내 돌아서서 다시 계단을 오른다.

 오전 6시, 화재경보가 울렸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거구나. 고막을 찌르는 경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비몽사몽 중이라 현실감이 떨어져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내려가야 하나? 실화인가? 같은 층 다른 집의 문 여닫히는 소리를 듣고 그제야 손에 잡히는 것 몇 가지만 들고 부랴부랴 나섰다.

 실내에서 태운 담배 연기 때문에 울린 거짓 경보임이 밝혀지고 주변을 둘러봤을 때, 웃음이 피식 나왔다. 모인 사람 수만큼이나 챙겨 나온 물건이 다르다. 저 이민 가방 속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여자는 눈썹을 경보가 울리고 그렸을까 마침 출근 준비 중이었을까. 여기서 반려동물 키우면 안 되는데. 개, 고양이는 오늘 쫓겨나려나. 저 남자는 거의 헐벗고 나왔네. 창피하겠다. 휴대폰은 하나같이 다들 챙겼구나.

 10여 년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 허영만 화백이 나와 수년간 그려온 인물 묘사 모음을 보여준 적 있다. 스크랩 북을 펼쳐 보이며 화백은 말했다.

"이건 제 밑천이라 불나면 제일 먼저 챙겨야 합니다."


 경보가 울리면 그 사람에게 가장 비싼 게 뭔지 알 수 있다.

 넌 뭘 챙겨나갈래?




* 일기(日气)는 매주 한편씩 헿요일에 올라옵니다.
* 김민기님의 그림은  http://instagram.com/kimminkiki/​ 에서 더 다양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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