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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앝 Mar 24. 2019

영화 <라스트 미션>을 봤다

글: 김선미, 그림: 김민기

 영화 <라스트 미션>을 봤다. 촉망받는 마약 운반책인 87세 할배 '얼'의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인지 보는 내내 심장이 쫀쫀하다. 백세가 다가오면 욕심에서 멀어질 거라는 나의 환상을 깨고 할배는 짭짤한 돈맛도 심장마비가 올 것 같은 불타는 섹스도 좋아한다. 90세 노인이 된 거장 감독은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었던 걸까. 분장비도 아낄 겸 할배 ‘얼’을 직접 연기했다. 메가폰과 운전대를 동시에 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굽은 등이 지쳐 보인다.


 200kg 마약을 싣고 미국식 뽕짝을 들으며 운전하는 '얼'의 조수석에 앉아보자. 얼이 세월의 힘을 못 이겨 쳐진 눈꺼풀 사이로 겨우겨우 앞을 보며 텍사스 고속도로를 쉼 없이 달리는 건 지난 87년을 만회해보려는 노력이다. 완벽한 백합을 피워 온갖 상을 휩쓸던 백합 농장주 얼은 80이 넘은 나이에도 꽤 매력적이어서 주변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담장 밖을 가꾸느라 정작 내 집은 챙기지 못한 업보로 가족에게는 노매력 천불 유발자다. 그리고 얼마 전, 영광을 누리던 농장은 인터넷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망해버렸다. 동시에 얼의 매력도 사라졌다. 유능한 가장의 흔한 전락이다.

 가끔 친근(親近)한 사이가 힘들다. 친해서 가까워진 거리가 너무 짧아 버거울 때가 있다. 꽃도 적당한 거리에서 보아야 예쁘지 코앞에서 보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암술, 수술이 더듬이 같기도 하고 말이지. 친밀해서 괴로울 정도의 거리는 몇cm일까. 꽃이 안 예뻐 보일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어떤 사이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겐 가족과 연인 정도 아닐까.

 너무 가까워 한 몸 같은 이들은 서로에게 100점짜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주고받는다. 적당한 사이에서는 80점만큼만 해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거리가 좁혀지면 90점을 받아도 부족한 10점이 도드라진다. 어떤 사이도 양말 놓는 곳, 치약 짜는 방법, 사용하는 단어, 상황별 리액션, 읽는 책, 사귀는 친구까지 피드백을 주고받지는 않는다. 누구는 기대치 싸움이라지만 나는 디테일 싸움이라고 하겠다. 서로를 근거리에서 지켜보고 부대끼는 만큼 챙겨야 할 디테일이 많아지는 거다. 원래 80점에서 90점 만드는 건 쉽지만 90점에서 95점 만드는 데는 노력이 몇 곱절 더 들어간다.

 나는 왜 80점 만으로도 서로 만족스러울 수 있는 ’아는 사이’를 넘어 100점을 목표로 하는 끈끈한 관계에 공들이며 고역을 치르는 걸까. 90세 호호 할아버지가 이제라도 만회하고 싶은 친근한 관계의 혜택은 뭘까. 누군가를 가까이에 두고픈 마음의 근간은 어디에 있을까.

 <도덕 감정론>이라는 책을 본 적 있다. 세상은 한 사람의 공로와 과오를 오로지 결과로 평가한다고 했다. 원칙에 따라 마약 밀매범 '얼'은 결국 법 앞에서 처벌받는다. 반면, 그의 가족은 못난 남편이자, 아빠, 할아버지 '얼'을 허탈할 정도로 쉽게 용서해준다. 모두가 결과로 나를 채점할 때 친근한 이들은 내가 100점이 되고자 노력했던 과정을 기억한다. 그 덕에 여전히 나는 80점짜리지만 100점에 가까운 사람처럼 남을 수 있다.










* 일기(日气)는 매주 한편씩 헿요일에 올라옵니다.
* 김민기님의 그림은  http://instagram.com/kimminkiki/​ 에서 더 다양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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