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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뻐서 주는 거야."
어떤 부분이 예쁘셨을까? 두 주 전, 마포문화재단을 찾은 날이었다. 일 하나를 마치고 별관 로비에 있는 휴게공간 비슷한 곳에서 미처 확인 못한 계약 내용을 훑고 있을 때였다.
"먹어."
"네?"
종이에 빠져있느라 누가 다가오는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드니 할머니 한 분께서 서계셨다.
"집어가 얼른."
팝콘이 가득 담긴 종이 봉지가 눈앞에 보였다. 이게 어떤 상황인지 몰라 주춤하는 사이, 고소한 버터향이 진하게 밀려왔다.
"먹던 거 아니니까 많이 집어가."
봉지가 흔들거렸다. 뭘까? 이분은 누구시고 왜 갑자기 나한테.
"아니 저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드세요."
"집어가라니까? 많이 집어."
뭔지 모를 상황에 불안하기도 했고 식사 때 아니면 먹지 않는 박힌 습관이 있던 탓에 그저 본능적으로 거부 의사가 샜지만 두 번은 거절하기 어려운 목소리였다.
"네... 그럼."
손을 깊게 집어넣으면 혹시라도 남은 팝콘이 오염될까 엄지 검지 중지만 사용해 조심스레 집었다. 손가락 두 번째 마디 끝에 닿을 정도로만.
"더 집어가!"
말투가 거칠다고 느꼈다. 그러나 속에서 반발이 올라오진 않았다. 상황을 곱씹어 보건대 폭력보다는 조금 사나운 정에 가깝단 판단이 섰으므로.
"앗. 네... 그런데 저 정말 괜찮아요. 이것만 먹을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열개 남짓의 팝콘을 손안에 끌어오고 나자 할머니께선 아무 말 없이 뒤쪽으로 걸어가셨다. 몇 칸 건너 뒷열 의자엔 다른 할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친구 분처럼 보였다. 아마 저 옆 자리로 가 앉으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 생각이 맞았다. 그건 다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금 튀긴 것처럼 따뜻한 팝콘을 입에 털어 넣은 뒤 읽다 만 서류를 쳐다봤다. 위에서 도장만 찍다 내려왔기에 내용을 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절반 지날 때쯤부턴 버겁다 느껴져 나머지 부분은 대충 눈으로 찍어 넘겼다. 공기관씩이나 돼 한없이 약한 소규모 사업장을 상대로 사기 치진 않을 것이란 신뢰를 가지고. 물론 뒤늦은 신뢰다. 귀찮아 마지못해 불러낸 그런 신뢰.
'맛있다...'
녹인 버터 같은 침을 꼴깍 삼키며 종이들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돌돌 만 다음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 매무새도 마저 다듬었다.
"가려고?"
"네? 네..."
"이리 와 더 가져가."
"아,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그냥 와. 이뻐서 주는 거야."
"진짜 아니에요. 아까 정말 잘 먹었습니다!"
"더 가져가라니깐... 그래, 그럼 가봐."
"네 그럼 저 가볼게요!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인사드리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음료라도 가져다 드릴까 어디 자판기나 매장 없나 살피다가 울리는 전화를 보고 당장의 급한 현실을 깨달았다. 아쉬움에 짜증이 솟았다.
"형, 여기 바로 일층이에요 홀이요. 여기서 리허설 중이에요. 오시면 문 열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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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을 마치니 세시에 가까웠다. 대흥역 쪽으로 혼자 걸어가는데 몹시 배고팠다. 마침 유명한 냉면집 본점이 부근에 있다 들어 그곳으로 가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기뻤던 건, 정말 역 근처였다는 사실. 거리 감각이 다른 상대의 말이었다면 고달팠을 것이다. 지도를 보고 설렌 게 얼마만이던 지.
노포 느낌 나는 가게 안에 들어가 물냉 한 그릇을 시켰다. 흔히 말하는 평양냉면. 일터 가까이 있는 분점 음식의 만족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따로 먼저 나온 면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센터에서 있었던 상황들을 느긋하게 떠올려 봤다.
'이뻐서 주는 거야.'
처음 본 타인에게 대뜸 호의를 받거나 기분 좋은 말을 듣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기대했던 일이 전혀 아니기에 하나의 사건처럼 각인을 남긴다. 그런 각인이 가져오는 효과는 꽤 대단하다. 이를 테면 녹음할 땐 별로였던 가수의 목소리가 리허설에선 꼭 옛 어느 왕국의 처연한 공주 같았던 일, 내내 굳어있던 눈매가 내려가고 입꼬리가 유연하게 풀려 관계자들과의 소통 분위기를 너그럽게 녹일 수 있었던 일 등은 그곳에 가기 전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긍정의 각성'을 이끌어냈다고 해야 할까? 어울리지도 않게.
면수가 비릿했다. 마치 제육 비계를 짜낸 마냥. 면수는 고소해야 하는데... 자세히 보니 정말 잘게 쪼개진 기름이 둥둥 떠다녔다.
'뭐지? 메밀 면수가 원래 이랬나?'
여러 곳의 평냉을 먹어봤고 자주 찾는 곳 또한 있었는데 그와 같은 면수는 처음이었다. 분석을 위해 한 모금 더 마셔 보고는 더 마실 일 없을 것 같아 주전자와 컵을 밀어놨다. 그리고 냉면이 나오자마자 육수를 들이켰다. 간이 얌전한 건 좋았으나 육향이 연했다. 면수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정도. 경험에 비춰, 제대로 된 육향은 제대로 된 버터향과 다르지 않다. 솔직히 여러 모로 실망스러웠다. 팝콘 생각이 났다.
'만 오천 원? 너는 정말 팝콘 아니었으면, 너어는 진짜.'
특히 식사 때 예민하게 굴던 평소와 다르게 그냥 속으로 조금 삐걱대다 말았다. 할머니는 고렙의 버퍼셨던 게 분명하다. 겨우 팝콘 한 줌 뿌려 깊게 감춰둔 내 안의 버터를 끄집어내시다니. 그 버터는 몸 구석구석 미끄러지며 만나는 모든 마찰 부위마다 자신을 묻혔다. 원래 버프란 건 쿨타임이 존재하기 마련이라 하루도 안돼 산패하긴 했지만.
연하고 비린 육향이 침투했으나 이미 좋은 버터가 자리 잡은 몸은 작업실 방향으로 가볍게 발을 돌렸다. 걸을 때 관절이 유난히 부드러웠던 것 같다. 다리도 쫙쫙 찢어지고 지나가는 사람 피할 때도 막 발레하듯이, 비둘기 피할 때도 막 막 탭댄스 추듯. 그리고 그날 밤, 남아있던 일의 세밀한 작업 과정에 들어가기 전까지 '가을 녹는점에 내장 기름 퍼진다', '육향보다 진한 팝콘 맛’ 같은 어쩌구저쩌구 우스운 문장 몇 개를 문득문득 쓰다가.
'그러니까요 할머니. 제가 왜 예뻤는데요. 어디가 예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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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없는 기간을 지나고 있다. 10월엔 보통 그간 쌓아 온 얘깃거리가 좀 있는 편이었고 그 이야기들의 흔적을 정리하며 몇 가지 들뜬 감각들을 얻곤 했는데 이상하다. 이렇게 텅 빈 10월은 조금 새롭다. 날카로운 연말의 한파를 견디려면 요맘때쯤 좀 몽글하고 말랑한 어떤 것이 몸을 감아가고 있어야 하지 않나?
사실 그 이유쯤은 알고 있다. 글로 옮길 수 없어 그렇지. 올해 들어 내 안에서 지치지 않고 마찰하는 혐오와 자극, 외로움에 대한 복잡한 심상들. 신물처럼 거슬러 오르는 그들을 글자에 묻혀 토해 낼 만한 용기는 없다 아직. 할머니의 폭신하고 기름진 팝콘을 받던 날에 대해 그래서 좀 더 생각하는 중이다. 그게 무슨 먼 기억, 적대와 미움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녹여버리던 그때, 어느 따뜻한 시절이었던 것처럼.
츄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