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은 큰 우산 같기도 하고, 고여서 썩은 물 같기도 하다. 같다는 표현을 하게 된 건 그 경계를 애매모호하게 걸터앉아 자신이 기우는 쪽으로 선택할 수도 선택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호해 줄 것 같은 울타리가 되려 압박하는 기분이라면 어떨까? 넘지 못하게 쳐 놓은 가시덤불로 둘러싸인 상황이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자유라는 말을 담지 못한다.
개인은 살아 있다. 단체는 개인이 모인 유기체다.
얼마 전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친구 한 명이 오늘 술 한 잔 가능하냐고 연락했다. 난 일정이 없었기에 시간이 된다고 말하며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라 퇴근이 기다려졌다. 한걸음에 달려 나가 만난 친구를 보니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눈물이 그렁거리는 듯 보였다. 웃픈 인사와 함께 간단한 안부를 건네며 모둠곱창과 술을 주문했다. 먼저 나온 술을 따라 마시고, 내려놓기 무섭게 바로 두 번째 잔을 채운다. 고개를 뒤로 넘기며 술잔의 술을 입에 털었다. ‘술이 달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 문장이 전부였지만 오늘을 말해 줬다. 말 끝나기 무섭게 잔을 채우고 두 번째 술잔을 내려놓으며 한숨만 쉰 그가 세 번째 잔을 가득 채웠다. 기본안주로 단무지와 된장찌개가 나왔지만 손도 대지 않았다.
세 번째 잔을 입에 적시자 취기가 올라오는지 꾹 참고 있던 속의 말을 뱉었다. '나 그만둘까 봐' 그는 소주를 들고 잔을 채우려다 내가 재빨리 낚아채 따라 주었다. 일렁거리는 소주잔에 비친 자신의 작아진 얼굴을 보며 마실지 말지 좌우로 기울이며 그대로 마셨다. “천천히 좀 마셔라. 무슨 일인데? 저번이랑 비슷해?" 그는 대답대신 젓가락으로 단무지 하나를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달기만 하던 술 대신 새큼한 맛이 전신을 휘감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만 위아래로 끄덕였다. 남은 소주가 반 병이 돼서야 주문한 곱창이 우리 테이블로 나왔다.
윤기 나며 노릇노릇해진 곱창은 숙주나물 위에 올려져 향을 더했고, 양파와 대파가 매콤한 맛을 더 했다. 집게를 든 나는 곱창이 타지 않게 뒤적거리는데 그가 말한다. “야 내가 딱 이 불판 위에 구워지는 곱창 같다. 일이 힘든 게 아니더라." 그는 잔을 채운다. ”어떻게 말하길래?” 곱창도 공감했는지 폭죽 터지듯 탁탁 거리며 함께 터진다. “곱창 터지는 거 보니 속이 터지네." 친구는 노릇노릇한 곱창을 입으로 넣었다. 입은 우물거리며 씹지만 눈은 뭔가를 생각하거나 과거를 회상하는 듯 반쯤 감겼다.
그가 어느 정도 허기를 달랬는지 기름으로 반짝이는 입술을 움직이며 말한다. “퇴근 10분 전에 보고서 써달라는 데 어떻게 해야 하냐? 오타, 줄 간격, 심지어 글꼴까지 지적하는데 속이 타더라, 나를 불판 위에 지지고 먹기 좋게 자르고 입맛에 맞게 소스에 곁들어 우물우물거리다 맛있으면 먹고 맛없으면 바로 뱉는 그런 삶 같아." 옆테이블에 식사하러 온 중년 남성들이 우리 쪽을 슬쩍 본다. "우리나라는 나이가 권력 아닌가?”곱창도 기름을 탁탁 터뜨리며 익어간다.
친구는 예전에도 유교문화에 질색했다. 명절날 차례를 지내기 위해 친척들이 다 모이면 여자들은 음식을 만들고, 나르며 남자들은 받아서 차례상을 차려 절을 한다. 여기까지는 문화이기에 백번 양보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밥을 왜 따로 먹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하고 싶지도 않았겠지. 남자들은 남자끼리 먹고 여자들은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부엌에서 따로 모여 먹는 모습을 보며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조부와 조모가 돌아가시고 차례와 제사 문제로 가족의 다툼만이 남았다고 한다.
권리와 권한은 있는데 책임만 없는 기이한 문화가 직장 내 암적인 제도로 자리 잡혔다고 말한다. 친구의 직장은 위계질서가 뚜렷해 직급이 올라갈수록 혼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한다. 아침에 신문을 챙겨줘야 하며, 출근 전엔 난방을 켜서 방을 훈훈하게 만들어야 하고, 밥시간이 다가오면 알려주고 밥숟가락도 놓아줘야 한다고 한다. 외식할 때는 계산하기도 한다는데 상사를 존중하는 건지 애를 키우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다. "말도 마 삐지면 기분도 풀어줘야 해. 월급은 직장상사에게 받는 게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상전으로 모셔야 하는 거야?" 술잔을 잡고 마시려 하길래 난 급하게 잔을 뺏었다. "야 혼자 그렇게 짠도 안 하고 세 번이나 마셨다고! 같이 마셔!" 친구는 술잔을 부딪치고 천장을 보며 술잔을 비웠다. 얼굴이 벌게진 채 나를 쳐다봤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고 다 타버리니 알코올로 소독하는 거야 소독!"
"사장님 여기 곱창 2인분 추가요!" 모자랄 듯싶어 나는 더 주문했고, 비워가는 불판 위에 생곱창이 돌돌 말려져 구워지고 있었다. 친구는 말했다 "이야 방금 말한 내 인생이 여기 다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