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신을 몰아붙이는 건 안다.
정작 멈추는 건 잘 모르는 듯하다.
"누군가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누구보다 노력했다고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고 말이야. 간발의 차로 이루지 못한 꿈과 실낱같은 희망을 꾸역꾸역 붙잡고 폭주하며 앞으로 나갈 때 누군가 브레이크 밟듯 멈춰줬으면 좋겠어."
하나. 이것만이 정답. 저것만이 오답
By. 터틀킹본인 만족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괜찮다고 여겨지는 직업을 얻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준비한 한 청년의 말이다. 그럼에도 청년은 멈추질 못한다.
그렇게 배워왔으며 새로운 시도는 용납할 수 없는 사회적 통념이 되었다. 뼈가 시릴 정도로 몸속 깊이 자리를 잡아 혼자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 않는다.
얼마나 춥고 고독한지 한 여름에도 공허한 가슴은 차갑다. 마치 눈이 거세게 내리며 바람과 함께 내 뺨을 때리는 듯한 추위 속에서 터덜터덜 힘겹게 걸어간다.
무엇을 위해 멈추지 못하고 폭주기관차처럼 달리는가? 알은 외부에서 깨지면 생명의 끝이고, 내부에서 깨지면 생명의 시작이라 한다. 청춘들의 열정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무얼 하고 싶은지 모르며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상태로 주변 사람들의 기대감, 억압,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 등 자신의 모습 위에 사회적 잣대의 붓으로 슥슥 자아를 덧칠한다. 그려진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바라본다.
둘. 뭉개진 내 얼굴
By. 터틀킹
언제부터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잊어버린 걸까? 잃어버렸다면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 잃은 게 아니고 잊어버린 거면 어떤 식으로 기억해야 할까? 지우개로 지운 부분의 희미한 곳을 보며 애쓴다.
생각은 정형화되고 의견은 통일되고 꿈조차 공장에서 생산하는 양산품처럼 뚝딱뚝딱 만들어 차이점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생산되고 길러진 우리들은 칠흑같이 어둡고 우거진 정글 속에서 손을 놓쳐 보호자를 잃은 미아가 된다.
결국 알은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힘을 받는다. 벼랑 끝에 서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모든 게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곳에 있는 사람처럼 깨질 준비를 하고 있다.
붓으로 막 칠 해진 내 본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보여줘야 하는 얼굴로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깨진 알처럼 서서히 식어간다.
셋. 붙잡아줘 멈출 수 있게
By. 터틀킹알의 생명 또한 안에서 시작되듯 자신의 감정은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오감을 통해 많은 걸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며, 만진다. 그렇게 얻은 세상의 기운과 감촉은 우리의 숨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엄마의 뱃속에서 따뜻함과 보호를 받으며 자라 세상에 나온 것처럼.
구석구석 몸을 탐험하는 세상의 감촉들을 느끼며 걸맞은 감정들로 뱉어낸다. 기쁠 때는 입가에 미소를, 슬플 때는 눈가에 눈물을, 신날 때는 온몸으로 환호를, 좌절할 때는 웅크려지며, 사랑할 때는 온 우주를 느낀다.
비로소 감정이 만들어져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표현한다. 표현의 끝은 다시 나로 돌아와 '나는 존재한다'라고 깨닫는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 청년의 절규는 자신의 상황과 비슷한 청년들의 비명을 대변하듯 보인다.
알은 외부로부터 다시 공격당한다. 다른 이들이 토한 감정들을 받아들여 해석할 시간이 필요한데 방대한 감정이 첩첩산중 쌓여 태산같이 많아진다.
부정적이고 자신이 원치 않는 감정들을 받아들여 내 감정의 씨앗이 자라지 못한다. 점점 자신의 존재는 껍데기와 이름만 남았을 뿐 움직이는 자양분은 타인의 감정으로 살아간다. 그렇게 멈추지 못한다.
한 청년의 한숨과 자신감 없는 목소리. 내 가슴을 후벼 팠다. 가까이 지내는 청년이기에 밥 한 끼와 커피 한 잔, 그리고 부담없는 응원과 위로 아닌 위로 말 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도 그 시절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과정을 견디며 지금이 있기에 잠깐이나마 느낀 감정들을 써본다.
취업준비 당시 내가 느낀 감정과 청년이 지금 느낀 감정들을 뒤섞어 써보았다. 서로 모르는 감정들과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넣었다. 이 글이 모든 청년들의 감정을 대변하진 않지만 이 글을 쓰게 해 준 청년에게 말해주고 싶다.
힘들었지? 그동안 고생 많았어. 누구보다 열심했잖아? 잠깐 앉았다 가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