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_ 독서를 많이 했다고 사람이 변하진 않는다
새벽 1시다. 아이를 재우고 거실에 나와서 지혜의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본 지 3시간째다.
거실은 최대한 가구나 물건 없이 뻥 뚫려야 보기 좋지만, 이상하게도 방으로는 들어가는 게 싫었던 지혜였다.
6인용 원목 식탁에 앉아서 책을 보니 목과 어깨가 뭉쳤었다. 게다가 식탁 주변에 책들이 널브러지니 지혜의 7살짜리 아들도 세월아 네월아 밥 먹는 중간에 책을 보려고 했다. 지혜는 '밥 먹을 땐 밥 먹는 것에 집중하자'라고 교육하기 위해 식탁에서 책과 필기구를 치웠다. 다른 방에 가서 읽자니 아들도 거실에 혼자 있어 무섭다고 반대했다. 그리고 지혜도 시야가 트인 거실에 있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TV 없는 거실에 엄마 책상과 아이 책상을 나란히 붙이고 넓은 독서대도 나란히 놓았다. 지혜는 책을 읽고 아들은 그림을 그리는 30분 남짓의 시간은 일상의 힐링타임이었다. 독서량에 욕심이 생긴 지혜는 밤 독서를 치열하게 했다.
진도도 중요했지만 필사하며 생각을 적어가는 시간이 좋았다. 어렴풋이 증발될 수 있는 생각을 지면에 잡아두고 나중에 다시 넘겨 볼 때 당시에 어떤 상황을 겪고 있었는지 책 읽으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장점은 읽다가 쓰면 졸음이 찾아오는 시간을 늦출 수 있다는 점이다.
회식 후 들어온 지혜 남편이 책을 읽고 있는 아내에게 감탄사를 날린다.
"이야.. 정말 대단하다~, 우리 지혜! 아직도 안 자고 책 보고 있어?"
"어. 아까 12시 때 졸음 한번 왔는데 책 들고 거실 왔다 갔다 걸으면서 고비 넘겼어..."
"졸리면 자~!"
"안 돼. 다음 주에 독서 모임 발제문 만들어야 돼서 어서 책 읽어야 돼."
지혜의 손에 쥐어진 책은 이지성, 스토리베리의 <이독(異讀)>이다.
지혜는 마음이 바쁘다. 어디에 쫓기는 사람처럼 책을 붙잡고 눈을 부릅뜨고 눈동자를 바쁘게 굴려본다. 그러나 남편과 대화를 하며 동시에 책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지혜야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책은 도대체 왜 읽는 거야? 책이 막~ 재미있어~? 공부하는 게 좋은 거야?"
"책을 왜 읽냐고? 그걸 말이라고 해?"
지혜가 의자에 엉덩이를 바짝 붙여 앉은 채 고개만 홱 돌린다. 술이 오른 남편의 얼굴을 한심하게 바라본다.
"아니... 궁금할 수 있잖아."
"궁금하면 자기도 책 읽어봐."
"알잖아~ 나한텐 책이 자장가인 거. 먹고살기 바쁜데 책은 무슨 책~"
책상 앞에 고집스럽게 앉은 채, 아까부터 계속 같은 페이지다.
"내가 자기랑 결혼하고 나서 여러 자격증 미친 듯이 딴 거 알지?"
"알지~ 우리 지혜 자격증 부자인 거 알지~~ 바로 ‘내 덕분에’ 지혜가 열심히 살고 있다, 내 알지."
"저번에 자기가 사고 치고 나서부터 나 책 읽기 시작한 거 알지?"
"알지, 그건 내가 할 말 없지~~"
"난 이 생활이 지긋지긋해. 제발 탈출하고 싶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잘살고 싶다고! 제발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지혜가 급발진한다.
남편도 맞대응이다.
"우리가 못 살아? 난 행복해. 넓은 새 아파트 살고 있고, 어?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차도 할부로 사려면 살 수도 있어. 우리보다 낮은 데를 봐야지 넌 왜 높은 데만 봐? 황새 쫓아가다간 끝도 없어."
"황새를 쫓아가겠다는 게 아니야. 나도 돈 걱정 없이 직장 생활 안 하고 싶고 읽고 싶은 책 읽고 배우고 싶은 거 배우면서 살고 싶어!"
"아니-? 내가 우리 월급 합한 금액 벌어 와도 넌 만족 못 해. 너 일하고 싶어 하잖아."
"우리 집 대출을 생각해 봐. 일 안 해도 되는데 하는 것하고 일 안 하면 대출 이자도 못 내는 환경하고 어떻게 같아?"
"같다는 말 안 했어."
"됐다. 그만해."
"책 잘 읽는다고 칭찬했다가 상황이 왜 이렇게 됐지?"
억울하다는 듯이 남편이 씻으러 들어간다.
다시 책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남편에게 화를 낸 이유를 자신도 알지 못한다.
오래간만에 지혜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냉장고에서 에일 맥주를 하나 꺼내 따르는 입구를 헹군 후 유리컵에 따른다.
책을 읽으면서 마시는 맥주, '책맥'이다. 독서 습관이 잡히고부터는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더욱 책에 빠져들려는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맥주를 홀짝이며 <이독>을 마저 읽는다.
지혜가 얼마 전에 <일독(日讀)>을 먼저 읽었을 때 매일(日) 읽는 습관을 만드는 지침서로 삼았다면 그다음 책인 <이독(異讀)>은 다른(異) 관점으로 속도보다 중요한 방향에 대해 나와 있는 책이었다.
지난주에 읽었던 <일독>을 다시 펴 봤다. 책의 귀퉁이를 접고 줄 친 곳을 봤다.
'어디선가 이 상황을 본 것 같은데.'
지금까지 해 온 독서가 다 헛것 같았다. 책 몇 권 읽었다고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변할 것이라고 믿었더니, 망상도 이런 망상이 없었다 - 이지성, 스토리베리 <일독> P.104 -
지난주에 읽고 눈물이 핑 돌았던 구절이었다. 남편에게 지혜가 화를 낸 것은 자신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생각을 입으로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혜야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책은 도대체 왜 읽는 거야?'
이 말을 '바뀌는 것도 없는데 책은 읽어서 뭐 해?'로 해석한 것이었다. 지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읽었지만 책을 읽어서 삶이 바뀐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독서를 단기간에 바짝 해치우고 생활이 나아지길 바랐던 내면의 생각과 마주하고 있었다. 생존과 성공의 수단으로 책을 읽고 나서 일정 기간이 되었을 때 예측이 빗나갔다.
추상적 개념인 '성공'이 눈에 보이지 않자 조바심이 나고 여태 해 왔던 독서가 다 헛것 같았다.
경제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은 남편의 잘못이며, 가족 중에 오로지 혼자만 고생하고 아무도 열심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남 탓', 그것은 지혜의 피해의식이었다.
책을 읽고 삶을 바꿀 거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언하고 다녔었다. 독기를 가지고 전투적인 독서를 했다.
그러나 지혜의 잠재의식 깊숙한 곳에서는 책을 통해 변화할 거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가 여러 번의 상처를 입은 지혜였다.
'역시 사람은 안 바뀐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 아니다.'
그러나 '바뀌지 않는 사람'은 지혜 자신이기도 했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자기방어와 회피의 종착지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한 불신이었다.
더 많은 책을 읽으려면 부족한 시간을 쥐어 짜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쌈닭처럼 투쟁하듯 싸우려고만 들었다. 당연히 독서는 피곤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독서와 삶을 공존시키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 이지성, 스토리베리 <이독> P.78 -
지혜는 목이 메고 눈물이 왈칵 솟았다. 막힌 목을 뚫기 위해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책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책에 나오는 '현성'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발견했다. 방금까지 피곤한 독서를 하던 지혜가 남편에게 쏘아붙인 말들은 바로 쌈닭의 투쟁이었다.
가족과 행복하게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 독서를 시작해 놓고선 가족과의 불행을 자초했다. 수면시간을 갈아 넣어서 '짜증'이라는 결과물을 만들려고 독서한 꼴이었다.
지혜는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나갔다.
<이독>에서는 읽기 싫어도 다시 읽으면 되고, 회의가 들어도, 독서로 변화한 것 같지 않아도 다시 하라고 나와 있었다. 지독한 실패를 딛고 결국은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들보다 중요하게 다가오는 점이 있었다.
이 책을 쓴 사람도 결국 같은 감정을 거쳤으며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똑같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책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읽어 나간다면 책으로 삶이 바뀔 수 있다고 잠재의식에 새기기로 했다.
자신이 피해자라는 무력감을 버리고 행복한 삶의 주인이라는 마인드를 가지기 위해 감사일기를 쓰기로 했다.
° 남편의 월급이 입금되어 감사합니다.
° 저녁에 밥 안 차리고 외식해서 감사합니다.
° 식세기 덕에 설거지 시간 줄어서 감사합니다.
°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대출 이자를 매달 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직장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 가족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 살아 있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