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_장편소설을 넘어 대하소설 도장 깨기
아이 키우기 좋은 깔끔한 도시다. 그래서 아이들이 몽땅 이 동네로 왔나 보다. 서울은 분교와 폐교 걱정인데 이 동네는 과밀이다. 인천시에서 가장 많은 입학생이 있는 것도 이 동네 학교다. 한 반에 28명씩 14반까지 있다고 한다. ‘초품아’는 많은데 중학교를 품은 단지는 거의 없다. 중학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제 내년이면 운동장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컨테이너 같은 모습의 ‘모듈학교’가 현실화될 것이다.
그전 학교에서는 집이 멀어서 불편했는데 너무 가까우니 당연하게도 단점이 있다. 제자들이 사방에 포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지만 슬리퍼를 끌고 편의점에 맥주 사러 나가는 것도 자꾸 주변을 의식하게 된다.
단지의 테두리를 지나는데 수풀에 적당히 가려진 분유통이 보인다. 암묵적 흡연 장소인가 보다. 1층에서 흡연하면 저층 세대가 담배 연기로 힘들어하니 최대한 건물과 먼 장소에 분유통이나 뚝배기가 있는 것이다. 금연아파트라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있던 은영의 집에도 손님이 놀러 왔었다. 암묵적 흡연 장소를 귀띔해 주었더니 새 아파트 참 살기 불편하다며 펄펄 뛰었었다.
타이거 자몽 맛 맥주 한 캔이 너무 당기는 날이다. 은영은 어두운 저녁에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이 아닌 4캔을 사서 검은색 장바구니에 담았다.
다녀오는 길에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다가 짠! 하듯 명랑하게 등장한 곱슬머리 제자와 마주쳤다. 중학교 제자들이 웬만하면 못 본 척해줄 텐데 국어를 유독 좋아하는 그 제자는 인사성이 참 밝다.
"쌤~! 안녕하세요~!"
"아유, 놀래라. 그래~ 학원 가니?"
"네~! 안녕히 가세요~!"
'또출네'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산속에 숨어 다니는 정신 나간 여자 또출네의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맥주를 사서 나오는 국어 교사의 모습을 누군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20년 가까이 된 노트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은영의 삶은 기록하는 삶이다. 어른이 되고 18년 동안 일기와 독서일기를 써 왔다. 책 두께로 20권 분량의 보물이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자료라기보다 살아온 흔적들을 이따금 씩 보는 것이 좋았다. 은영은 '책 봄' 독서 필사 모임이 아니라도 이미 생활로 다져진 습관이다.
은영이 대학교 때는 <태백산맥> <아리랑>과 더불어 대하소설이 재미있었다.
은영의 '인생 책'은 박경리의 <토지>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교육대학교를 다닐 때 읽은 전 20권짜리 <토지>는 유독 은영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초반부에 경상도 사투리를 그대로 살려낸 대사들과 어린 시절 시골 할머니 댁을 갈 때 봤던 시골의 풍경이 그대로 살려놓은 문체가 너무 흥미로웠다.
많은 독서일기 중에 은영의 머릿속에 남는 책들은 소설들이었다. 정확히는 소설 속 ‘장면들’이었다.
자기계발서의 본질은 비슷하다. 가슴 뜨겁게 동기부여가 되었다면 지금 시작을 하고, 목표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소설의 본질도 비슷하다. 시대는 달라도 인간의 본성은 비슷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인간상들을 간접으로 경험해서 좀 더 나은 생각과 판단을 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은영이 가끔 독서 노트를 펼쳐 보면 그림들이 있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한 단락을 읽고 그것을 대충이라도 그림을 표현해 놓은 것이었다. 그 그림은 그 당시에 머리에 그려졌던 배경과 느꼈던 감정을 소환한다.
자기계발서는 격한 공감 끝에도 덮고 나면 금방 잊히는데 왜 소설은 덮고 나서도 장면들의 잔상이 눈에 맺힐까.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외우고 싶은 문장은 잘 보이는 곳에 적어 두지 않으면 얼른 잊히는 반면 소설 속의 한 장면이나 이미지는 기억하기 쉬웠다. 그것은 뇌가 글자보다는 이미지와 친하기 때문이었다. 뇌가 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은 쓸모 있는 정보다. 아무리 머릿속에 떠돌고 있는 정보도 써먹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행동하지 않을 구실을 만나 자취를 감추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 그녀가 대하소설 박경리의 <토지>를 읽었을 때 등장인물이 많아서 머릿속에 그림이 잘 안 그려졌던 게 생각났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책의 등장인물이 500명이 훨씬 넘고 배경 지역도 경상도에서 전라도, 서울, 중국 간도까지 다양하다. 그래서 가장 어려웠던 과제 ‘인물 호칭’을 중심으로 인물관계도를 그렸다. 전체 20권 중에 3권까지만 읽었는데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 충격이었다.
그저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그려나가다 보니 이해가 더 잘 되어서 <토지>가 너무 재미있어졌던 기억에 오랜만에 타이거 자몽 맛 맥주를 마시며 예전 토지 필사 노트를 펼쳐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