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_선플라워 사장, 알고 보니 작가님
"은선 사장님~안녕하세요~"
지혜가 '선플라워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지혜 씨 오랜만이에요~"
"네~ 와야지, 와야지 했는데 요즘 회사 일이 바빠서 연장근무한다고 낮에 못 왔어요."
"또 또~ '바쁘다' 타령~ 시간이 나면 오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와야죠~ 우선순위 문제라고 얘기하지 않았어요~?"
플라워카페 사장이 일부러 입을 비죽거리며 서운한 티를 낸다. 지혜가 둘러보니 지난번보다 손님이 더 붐빈다.
"아무렴 먹고사니즘이 더 우선순위죠~ 그리고 저번에 왔었어요. ‘꽃사장님’한테 얘기 못 들으셨어요? 얼떨결에 저 독서 모임 만들었잖아요."
"오, 그거 좀 멋진데요~? 그래서 오늘은 뭐 드실 거예요?"
칭찬에 신난 지혜가 말을 이으려다 허둥대며 카드를 꺼낸다.
"에티오피아 코케 허니 G1요."
"안 그래도 원두가 오늘 들어와서 괜찮을 거예요. 카드 이쪽에 꽂아주세요."
원두를 가는 소리, 포트에 물이 끓는 소리, 까만색 드립 포트에 물을 옮겨 붓고 드리퍼에 종이로 된 필터를 깔고 가볍게 적신다. 간 원두를 종이 필터 위에 담고 주둥이가 길고 좁은 드립 포트에서 가는 물줄기가 미끄러지듯 가운데로 내려간다. 코끝에 스며들어오는 구수하고 새콤한듯한 커피 향을 놓칠세라 들이마신다.
"음~ 커피 향~"
원두 위에 달팽이 집을 짓듯 물줄기가 그려진다. 미니 커피 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잔거품이 봉긋하게 솟는다. 따뜻한 물로 데워 놓았던 넓은 잔에 눈동자처럼 까맣고 맑은 커피가 담긴다.
"사장님 저번에 책은 시간 내서 읽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죠."
"책을 좀 많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집안일하는 횟수 줄이고 아이 책도 좀 덜 읽어주고 한 30분 정도 저녁 시간을 냈거든요? 근데 그거 가지고는 택도 없더라고요."
"지혜 씨가 시간을 내려고 노력했네요~ 커피 어서 드세요. "
"근데 사장님은 책 어떻게 1년에 100권씩 읽으시는 거예요?"
지혜는 오늘 커피를 마시러 온 게 아니라 인터뷰를 하러 온 모양이다.
"저야 뭐 새벽에 일어나서도 읽고 쓰고, 손님 없을 때도 읽고. 대신 일찍 자요."
"아, 사장님도 필사하시는구나~"
"필사도 하고, 책도 써요."
"네?? 책을 쓰신다고요?"
지혜의 눈이 크게 벌어진다.
"아, 저 3권 냈고, 4번째 책 쓰고 있어요."
"4번째 책이요? 작가님인지 몰랐어요...! 여기 책이 있었어요? 제목이 뭐세요? 아 왜 몰랐지... 죄송해요, 근데 어떻게 커피까지 하세요?"
질문 폭탄이다.
"하하, 지혜 씨~한 가지씩 물어봐요~. 어린이 인성 동화랑 청소년을 위한 고전이에요. 카페엔 제 책 안 놔뒀어요."
"왜요?"
"각자 맞는 책이 있으니까, 딱 필요할 때 책이 찾아오잖아요~"
지혜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래도 책이 일단 눈에 보여야 펼치죠~ 다른 책만 놔두지 말고 작가님 책도 홍보할 겸 놔둬 보세요~ 저도 검색해 보고 하나 살게요~. 그럼 네 번째 책은 어떤 거 쓰시는데요?"
"제 이름을 딴 '선플라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을 에세이로 쓸 생각이에요."
그리고 토요일엔 대관이나 강의를 하려고 해요.
"와..."
은선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 지혜의 입이 닫히지 않고 있다. 괜히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아 참! 사장님 아니, 작가님은 책을 왜 읽으세요?"
"독서의 이유요?"
"네. 책을 무작정 많이 읽으려고만 했는데 남편이 책은 도대체 왜 읽는 거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하셨는데요?"
"그땐 짜증을 버럭 냈어요. 그리고 나중에 사과했어요. 부자이거나 성공한 사람들은 다 책을 좋아한 것 같아서 그냥 잘살아보려고 읽었던 것 같아요. 근데 바뀐 게 없는 것 같으니까 짜증이 났던 거고요."
"그래서 책 읽는 이유는 찾으셨어요?"
"잘 모르겠어요. 책 읽고 안 바뀐 건 사실이니까. 부자 됐다는 사람 책에 보면 지독히 가난하다가 갑자기 책을 미친 듯이 읽고 드라마틱하게 성공하잖아요? 그걸 바랐었나 봐요. 그냥 지금은 긍정적인 생각 하려고 별것 없는 날도 감사일기 종종 쓰고 있어요. 저를 좀 믿어 보려고요."
자신 없게 들리는 지혜의 말에 은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감사하는 일기도 좋아요~."
"아.. 되고 싶은 일을 미리 쓰는 건가요~? 예언처럼요."
"그렇죠. 저는 아이들이 크면서 학교 도서관에 엄마의 책이 꽂히면 좋을 것 같아서 책도 원고를 쓰면서 '학교 도서관에 내 책이 꽂혀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세 달 동안 썼어요. 나중에 딸이 제 책을 대여해 오더라고요."
"우와..."
"지혜 씨, 이거 한번 읽어봐요."
은선이 카페의 책장으로 가더니 지혜에게 노란 책을 한 권 건넨다.
"<꽃들에게 희망을> 이거 알아요. 어릴 때 봤어요. 나비가 되는 과정이잖아요. 줄무늬 애벌레가 좀 징그럽게 생겼긴 하지만."
"어릴 때 본 것하고 커서 보는 것 하고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면서 천천히 봐요."
자리에 앉아 지혜는 노란 나비가 그려진 책을 펼쳤다. 그림이 많고 내용이 쉬워 역시 술술 넘어갔다. 역시 호랑애벌레는 좀 징그럽다고 생각한다. 여자 애벌레로 추정되는 노랑 애벌레에 감정 이입을 해 본다.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과정에서 숱한 고난을 겪고 이유도 모른 채 경쟁을 한다. 그러다가 노랑 애벌레는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늙은 애벌레를 발견한다. 나비가 되기 위해 실을 뽑아 자신의 몸을 감는 중이다. 고치를 만드는 것이다.
"나비가 되기로 결심하면 무엇을 해야 되죠?"
"나를 보렴. 나는 지금 고치를 만들고 있단다. 내가 마치 숨어버리는 듯이 보이지만 고치는 결코 도피처가 아니야. 고치는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잠시 들어간 머무는 집이란다. 고치는 중요한 단계란다. 일단 고치 속에 들어가면 다시는 애벌레 생활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고치 밖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란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야!" - <꽃들에게 희망을> 트리나폴러스, p.76 -
지혜의 눈이 떨린다. 울컥 목이 멘다. 요즘 책을 읽다가 눈물이 너무 자주 난다고 생각한다. 급히 먼산을 보고 눈을 굴려본다. 눈물이 툭 떨어진다. 냅킨으로 몰래 눈물을 닦는다.
'고치의 시간. 나는 나비!'
윤도현밴드의 '나는 나비' 노래가 머릿속에서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그제야 지혜는 자신이 고치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변화를 꿈꾸며 외롭게 단절되는 시간 속에 있었다. 밖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딱딱한 번데기이지만 결국 나비가 될 운명을 믿고 나비를 만들고 있는 시간의 방인 것이다.
지혜가 책을 읽고 변화한 게 없다는 느낌이 든 것은 외부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주식을 고민 없이 빠르게 사서 단시간에 돈을 벌고 싶어서 애탔던 시간처럼, 독서에 단기간에 집중했는데 대단한 성과가 바로 나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모습이었다.
애벌레가 번데기를 건너뛰고 나비가 될 수 없듯이 나비의 때를 기다리면서 내면을 개조시킬 시간이 지금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결과가 없냐고 스스로를 쪼아대지 않고 지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는 위로를 받는다.
"고치! 고치였어요!"
"네?"
"지금이 고치의 시간이라고요. 이제 독서로 고치를 만들고 있는데 나비가 왜 빨리 안되냐고 하고 있었던 거예요! 물도 끓는점이 있는데! "
은선이 미소하며 피낭시에 디저트 하나를 꺼내어 지혜에게 준다.
"답을 찾은 것 같아서 축하해요 지혜 씨. 고치 속에서 나비 잘 만드세요."
"아 참, 작가님은 책을 왜 읽으세요?"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