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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스 Aug 18. 2023

시골에서 자전거로 학교 가면 생기는 일

30년 전 자전거 등교의 매운맛

동생에게 두 발 자전거 배우기

두 발 자전거를 남동생에게 배운 것은 9살이었다.

어느 날 아빠가 자전거를 두 대 얻어오셨다.

사촌오빠들이 타던 것이었다.

남동생이 달려들어 아빠한테 보조바퀴가 있는 자전거를 열의 있게 배우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자전거는 큰 관심이 없었다. 한번 타 보라는데 드르륵, 드륵, 하며 보조바퀴가 마당을 불규칙하게 쓸고 지나가는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의외로 다리에 힘도 들었다.


동생은 아빠한테 브레이크 잡는 법과 따릉이 종 누르는 것을 신나게 체험해 보는 중이었다.

"따릉, 따릉, 따릉~~~"

"시끄럽다."

"따릉, 따릉 따릉 따릉~~~ "

"아, 그만하라고~"

꽤나 자전거가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아빠한테 이젠 바퀴를 떼고 싶다고 말 하니 아빠가 보조바퀴를 떼 주셨다.

이젠 진짜 두 발 자전거다. 뒤에서 아빠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안장을 잡아주고 몇 번 달리셨다.

"누나! 내 작은 바퀴 뗐다!"


혼자 자전거를 타고 마당을 넘어 길 쪽으로 멀리까지 가보더니 또 마당을 한 바퀴 돌다가 마지막에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다음날도 남동생은 자전거 타기 연습을 하더니 이제는 제법 폼이 나게 타고 있었다. 확실히 보조바퀴를 떼니 드르륵 소리도 안 나고 매끄럽고 더 빨라진 것 같았다.

나는 넘어지는 게 무서워서 안 탄다고 했다.

하지만 동생은 나랑 시합하고 싶은지 끈질기게 약을 올리며 누나도 타보라고 용기를 주고 재촉을 했다.

"저기 논두렁에서 한 발 올리고 타면 된다. 내가 뒤에서 잡아줄게~"

나보다 비쩍 말라서 고만고만한 키 8살이 잡아준다고 큰 의지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전거가 생긴 이상 영원히 안탈수도 없고 귀찮게 자전거를 몰고 와서 알짱대는 동생한테 킹 받기도 해서 그냥 동생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 질 녘이 될 때까지 연습했다.

서고 싶을 땐 브레이크를 잡아야 하는데 "어 ~ 어, 어~!" 소리만 내고 두 발을 벌려 한 발은 바닥, 한 발은 논두렁에 걸치며 신발의 마찰로 지-지-직 멈췄다. 몸 따로 마음 따로였다.


왜 동생은 하루도 안 걸려 다 배운 것 같은데 나는 이렇게 운동신경이 안 따라 주는지...

 스카이콩콩은 내가 동생보다 더 잘 타는데! 마당에 구멍 나도록 뛰어줄 수 있는데~! 몇 번 넘어지고 절망스럽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논두렁이 있는 매끈한 시멘트 길 가에서 저녁 6시가 훌쩍 넘도록 맹연습을 하고는 드디어 나도 두 발로 타고 브레이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8살짜리 동생에게 9살 누나가 배운 두 발 자전거였다.  

해가 지면 집에 들어간다는 닭들

닭도 해지면 닭장에 들어가는 법인데 너희는 닭만도 못하냐 소리를 들으며 저녁상에 앉았다.

하지만 아홉 살 인생에서 이렇게 뿌듯하고 성취감이 느껴진 적은 또 없기에, 손톱사이 흙 때가 끼든가 말든가 그저 입이 찢어지게 웃고 있었다.


그날 부로 우리 인생은 자전거가 있던 날과 없던 날로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학교를 걸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초등 저학년 어린이였기에 4km를 걸어서 등교하려면 1시간 30분 이상 걸리고 특히 여름엔 더위를 먹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빠르면 40분 컷이 나왔다.

마을 입구까지는 흙먼지를 날리며 , 그러나 차가 없이 안전하게 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총거리의 반 지점인 마을을 벗어나면서부터 검은 포장도로에서 간헐적으로 지나가는 트럭들과 경쟁해야 했다. 헬멧은 안 쓰던 시절이었고 자전거 도로는 더더욱 없었다. 그저 바쁘게 차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동생과 경쟁하며 빠르게 달릴 뿐이었다.

그렇게 자전거로 학교에 가다 보니 2학년인 나는 어느새 4학년이 되었다.

내가 물에 빠진 채 학교 가는 생쥐가 된 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듯이, 추운 겨울 어느 날, 등굣길에 딴생각을 하다가 나는 그만 자전거 채로 50cm 정도로 파여있는 도랑에 빠지고 말았다. 또랑은 2차선 도로 옆에 시멘트로 만든 인공 또랑이었는데 살얼음이 녹아서 잠바의 반 이상과 엉덩이, 허벅지까지 다 적시고 말았다.  허벅지 뒤쪽보다 앞쪽이 더 시렸다.

 오른쪽 도랑에 빠진 나. 30년전에는 물이 더 높았는데...ㅋ(출처: 카카오 로드뷰)


몹시 집으로 가서 모든 옷을 갈아입고 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이미 학교가 집보다는 가까운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아빠는 1학년 때부터 '학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하는 곳', '심한 감기몸살이 걸리면 일단 학교에 간 다음 쓰러져야 하는 것'으로 교육해 오셨기에 집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비참했다.


지각을 하고, 교실문을 힘겹게 열었다. 어좁이가 되었다. "오줌 싼 거 아니에요"라고 해명할 용기도 없었다.

교탁과 교실 문 사이에는 난로가 등유 냄새를 풍기고, 주전자물은 증기를 뿜고 있었다.

선생님이 어찌 된 일이냐고 하셔서 오는 길에 물에 빠졌다고 했다.


추우니 빨리 잠바를 벗어서 난로 근처에 널라고 하셨다. 간이의자 같은 것에 잠바를 걸쳐놓고 나도 잠시 난로 앞에서 온기를 쬐었다.

잠바가 타지 않도록 조심하며, 따뜻해지니 뒤집어서 다시 말렸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나의 시선은 잠바 손목부근으로 가게 되었다. 주황색일 때는 큰 표가 나지 않았던 손때 였는데  뒤집어서 밝은 색의 양면 안감이 나오니  때밖에 안보였다. 창피해져서 금방 다시 뒤집고 태연하게 그냥 입었다.

이제 안 춥다고 말은 했지만 덜 마른 옷은 찝찝한 느낌을 종일 간직하게 해 준다.

도랑물에 빠진 뒤 그대로 등교한 겨울날을 잊을 수 없다.



동생이 순간이동 한 날

사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 것은 남동생이 경험적으로 더 잘 알고 있다.

온 가족이 아직까지 얘기하던 추억 하나 가 있다.

학교를 갈 때 엄마는 마당 끝까지 나와서 우리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짓을 하며 인사를 해주셨는데 '안녕' 하듯이 좌우로 흔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오른손의 손끝이 아래를 향하게 손목을 접고 손등으로 공기를 쳐 올리듯이 하는 동작이었는데 어서 서둘러 가라는 뜻이었다.  

그 손동작이 오해스러운 날이었다.


늦었다고 서두르며 가는데 그날따라 우리 이름을 뒤에서 애타게 부르며 빠르게 손짓으로 인사를 해주셔서 우린 뒤를 돌아보며 알겠다고 화답했다. 그런데 이름을 또 부르시길래 손을 보니 이쪽으로 오라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라 고오~?? 어??~~  엄마가 뭐라카노?" 하며 동생을 보는데,

옆에 자전거 탄 채로 있어야 할 동생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응? ○○야~? "

"으윽..! 누나..."

"어노!??"

"여기, 밑에.."

길 옆 작은 벼랑이라 해야 하나? 개울가 1.5M가 넘는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지하철을 몇 번 타 본 사람이라면 열차를 승하차하기 전 "발 빠짐 주의, 발 빠짐 주의."라는 안내방송이 나올 때 날씬한 어린이 한 명쯤 쏙 빠질 정도로 아찔한 공간을 본 적 있을 것이다.  뉴스에서 4살쯤 되는 아이와 보호자가 열차를 타려다 아이가 사라져서 보호자가 당황하며 두리번거리는 CCTV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난 그때 너무 그 상황이 공감되었다.
이길 왼쪽으로 자전거 탄 채 뚝 떨어진 남동생. 이제는 떨어지지 말라고 턱이 올라 와 있군...ㅎ(출처: 카카오맵 로드뷰)

다행히 거기는 조약돌들이 엄청 많이 쌓여 있는 곳이라 오히려 그 동그란 돌들이 충격을 흡수해 줄 만한 장소였다. (직접 안 떨어져 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기가 질려 놀랬다가, 동생이 안전해 보이는 상태임을 확인하고 나니 박장대소가 나왔다. 얼마나 황당했는지~

엄마는 저 멀리서 뛰어왔다. 멀리서 지켜보는 이 광경은 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빨리 가라고, 어서 잘 가라고 이름 부른 것이었는데 평소와 다르게 너무 애타게 부르는 것 같아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채로 고개만 뒤로 바쁘게 돌리다가 그만 뚝. 떨어지고 만 것이다.

동생은 다리를 잠시 절뚝거려 보더니 이내 훌훌 털고 나와서 엄마와 어이없는 웃음을 나누고는 다시 나와 함께 바쁘게 페달을 밟아 학교를 갔다.  


지금도 자전거로 6.5km 회사를 출퇴근한다. 위험해지거나 사고가 난 적도 있지만 그만하길 천만다행으로 , 계속 타게 된다. 덜 녹은 눈길에도 두세 번 넘어져보니 , 눈이 덜 녹았을 때는 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몸소 느끼게 되고, 차와 살짝 박아보고 나니 자전거가 탔을 때는 차, 끌고 갔을 때는 사람인 것도 알게 되었다.

나란 사람은 꼭 이렇게 몸소 배워야만 느끼나 보다.


자출사(자전거로 출 퇴근하는 사람)가 된 체력은 9살에 자전거 등교로 만들어진 종아리 알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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