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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스 Aug 08. 2023

1학년  봄소풍, 절망의 보물찾기

"엄마, 미안해요"

30년 전 산골에서 소풍을 갈 만한 곳은 많지 않다.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줄지어 걸어갈 수 있도록 학교에서 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에 , 그늘도 좀 있으면서 돗자리를 피거나 수건 돌리기도 할 수 있을 만큼 편평한 곳이 소풍장소이다.

유치원 때는 소풍을 갔는지 안 갔는지 기억이 안 나고 나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봄소풍이다.

엄마들도 소풍을 따라왔는데 우리 엄마도 뒤늦게 오셨다.

양돈업(돼지 450마리, 축사가 7개나 되었다.) 을 하는 집이었기 때문에 일손이 바빠서 솔직히 엄마가 오실지 몰랐다.


짝을 짓기 놀이

"달팽이 집을 지읍시다,~ 달팽이 집을 지읍시다~  점점 크게, 점점 작게, 점점 크게 세 사람~!!!"

하면 선생님의 구령소리를 듣고 재빨리 인원수에 맞게 근처 친구들과 포옹을 하며 친한 척을 해야 한다.

네 사람으로 시작해서 세 사람, 그다음엔 인원수가 제법 많은 일곱 사람을 부르면 반 친구들의 반이 탈락한다.

왜냐하면 시골 학교는 학생 수가 적기 때문이다.


병설 유치원에 24명 정도가 입학하여 1~2년 동안 유치원 생활을 한 다음 우리 집 보다 더 산골짜기에 사는 친구들은 1학년이 되면 전교생 (1학년부터 6학년까지) 4명 혹은 6명이 전부인 각자의 분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는 소풍때와 가을운동회 때뿐이다.

1반밖에 없어서 유치원 반친구가 고등학교 반친구가 된다.

도시로 이사 가는 친구가 이곳으로 전학 오는 친구들보다 많다. 우리 학교는 제법 커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인가 4학년 때 근처 학교들을 흡수했다. 멀어서 가 본 적도 없는 초등학교 1개와 분교 2개의 모든 학생들이 우리 학교로 전학을 온다. 비로소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전교생이 100명 언저리가 되었던 것 같다.

대부분이 탈락할 때 함께 탈락하면 그나마 괜찮은데, '세 사람!'을 부를 때 평소 그나마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나를 밀쳐버리고 저 살겠다고 다른 두 친구와 어깨동무하고 뭉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상처를 받게 된다.



손수건 돌리기

가장 기분 좋은 놀이인 것 같다. 내 뒤에 있을지 없을지 페이크를 놔가며 손수건 돌리기를 하는 술래. 마니토도 아닌데 혹시 내 뒤에 손수건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설레는 맛이 있었다.

어떤 술래는 어이없게도 자신이 손수건을 어디다 떨어뜨렸는지도 모르고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 다 같이 웃은 적도 있았다.


점심을 먹기 전 각자 부모님에게로 가서 먹고 몇 시 몇 분까지 이 자리에 다시 모이라는 말씀을 듣고 나도 엄마를 어슬렁어슬렁 찾았다.


근데 엄마가 저기 잔디 사이사이 소나무 아래에서 학부모가 아닌 나물 따는 아주머니들과 넉살 좋게 담소를 나누며 취나물을 한 아름 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짜증도 나고 엄마가 창피했다.  


딸아이 소풍을 보러 왔으면 어떻게 소풍을 보내고 있는지 보거나 다른 아이들 엄마와 친목을 도모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머릿수건 두른 낯선 두 아주머니들이 "어머~~ 여기도 있네~" 하는 소리를 듣고는,  엄마는 내가 온걸 알아차리지도 못하는지 "거기도 있어요?"라고 화답하며 신나게 산나물 채취를 하느라 소풍장소를 훨씬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 취나물 (출처 : doopedia.co.kr)

나는 괜스레 민망하기도 하고, 좀 와서 도시락을 같이 먹었으면 해서 엄마에게 말을 건넨다는 게


 "아줌마, 여기도 취나물 있네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머릿수건을 두른 한 아주머니가 "딸래미 아닌가요?  엄마보고 아줌마라 하는고?" 라고 묻는 것이다. 엄마도 무안해져서는 왜 엄마한테 그러냐고 하시며 눈을 흘기셨다. 그러고는 약간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몇 년이 지나도 엄마는 그때 암마라고 부르지 않고 아줌마라고 부른 것을 서운해하셨다.

엄마 죄송해요. 그땐 창피했고, 지금은 라도 산나물 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ㅎㅎㅎㅎ


나의 아들이 1학년 방과 후에 돌봄과 활동을 해주는 프로그램인 '돌봄 교실'에 데리러 간 적이 있다. 다리 반깁스를 해서 태권도학원차가 학교로 픽업하지 않고 집으로 가는 날이었는데 작은 목소리로 복도에서 아들 이름을 미소 지으며 불렀다. 아들은 목소리를 최대한 죽였지만 표정은 우락부락하게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엄마-아아~! 여기까지 들어오면 어떡해~ 창피하게~!"


너무 무안하고 서운했다.

혼자 집에 오지도 못하면서, 교실도 아닌 복도 앞에서, 하교해도 되는 시간에 '살짝' 부른 것 때문에 8년 동안 키워주고 희생한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다니,..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내가 1학년 봄소풍 때 엄마를 창피해하던 일이 생각났다.

소풍장소. 소나무 군집 (출처: 네이버 거리뷰)

대망의 보물찾기

소풍의 피날레는 보물 찾기가 아니던가?

해적이라도 되는 듯이 여기저기를 찾으며 보물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그러나 불행히도 나의 생애최초 보물 찾기는 유쾌한 추억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고는 뭐라고 말씀을 하셨다. 잘 안 들렸다.

아이들이 너무 시끄러워서인지 내 집중력이 흐려서인지 모르겠다.

내가 들은 선생님의 말씀은, 흰 종이가 여러 개 있을 거라고, 흰 종이를 찾아오면 선물로 바꾸어준다고만 들렸던것이다.


아이들이 눈에 광채를 내며 거미같이 흩어졌다.

8분쯤 흘렀을까, 소나무에 난 구멍에 손을 넣어보기도 하고 땅에 제법 큰 돌멩이를 들어 올려 보기도 하더니 "앗, 찾았다!" ,  "와~! 보물이다!"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것이다.

아직 보물발견하지 못한 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때 유치원 때부터 좀 모자라는 행동을 해오던 친구가 다가오더니 

"저기 흰 종이 많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운동화 흙이 패일 정도로 힘차게 달렸다.

그 친구도 달렸다.

우리는 함박웃음을 짓고 달렸다!

평소에는 왠지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는데 그날만큼은 왠지 동지애가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친구와 보물을 찾았다.

선생님들이 모아서 묶어 놓았을 쓰레기봉투를 뒤졌다.

흰 종이가 많이 나왔다!!

죄다 보물이었다!!!

모두가 생각지도 못한 '쓰레기를 담은 봉투'에 있는 '종잇조각'들을 찾아 스스로를안아주듯 배와 가슴로 끌어안고 선생님께 달려갔다.


선생님은..

쓰레기를 왜 가져왔고 물으셨다.

"흰 종이요~!!!"

"네 선생님~! 여기도요~ 많이 찾았지요?^-^"

"아니... 이렇게 네모난 흰 종이에 '선생님 도장'이 찍혀있는 걸 들고 와야지~!  빨리 가서 쓰레기 도로 담아~!"

아...! 절망과 짜증이 밀려왔다. 꺼낼 때는 몰랐는데 종잇조각들을 다시 봉지에 넣으려고 보니 들개가 헤집어놓은 것처럼 주변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내가 이 모질이 친구와 함께 모질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했다.ㅋㅋㅋ

그 친구는 별로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봄소풍, 나는 종일 모든 게 창피함 가득인 채, 절망스런 '생애 최초 보물찾기'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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