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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스 Oct 21. 2023

산골 봄의 씹을 거리

버들피리, 고로쇠물, 산딸기.

만물이 얼어붙어 몹시도 추운 산골의 추위를 이겨내면 30년 전에도 잊지 않고 봄은 찾아왔다.

가장 먼저 봄을 깨우는 청량한 시냇물소리.  얼음물이 녹으며 쫄쫄쫄 소리가 나면 물이 차오른 버들강아지는  솜털에 윤을 내며 몸집을 부풀리고 비었던 화단의 흙에서도 목단의 붉은 싹이 올라왔다. 


버들피리 (호드기)

버들강아지의 중간 가지를 이웃 오빠가 도루코 새마을 칼로 끊어냈다. 문구점에서 100원 주면 살 수 있는 칼이었다. 손가락 길이보다 좀 더 길게 버들강아지 마디를 잘라 조심스레 비비고 비틀면 연녹색의 단단한 심지와 매끈한 나뭇껍질이 분리되며 빠진다. 한 번만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아까 것은 비틀다가 껍질이 찢어져서 다시 잘랐다. 단소처럼 입으로 부는 쪽에는 살짝 홈을 팠다. 그걸로 어떻게 소리를 낸 건지 오빠가 불면 뿌우- 하고 소리가 났다. 내가 받아서 불어보니 처음엔 요령이 없어서 훅 입김 바람소리만 나더니 좀 더 입술을 눌러 부니 뿌우- 소리가 났다. 


소꿉놀이

버들강아지가 병아리털처럼 활짝 피고 지면 본격적으로 잎사귀가 커진다. 길쭉하고도 둥근 잎은 소꿉놀이에 있어서는 돈과 다름없었다.

냇물 중간에 징검다리를 밟고 도착한 널따란 바위에서 나는 이가 나간 그릇에다가 분주하게 흙탕물을 탄다. 마음이 바쁘다. 남편이 퇴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네 남사친이 자전거로 저 멀리서 퇴근하는 척을 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학교 친구들 중 그 누구도 회사생활을 하는 부모님 없이 농사, 목장, 자영업이 직업이었지만 소꿉놀이에서는 언제나 나의 남편역할은 회사원이었다. 역시 월급쟁이가 최고였나 보다.


"아빠 다녀왔다." 하고 친구가 자전거를 세우면, 내 남동생이

"아빠 다녀오셨어요?" 하면서 좀 전까지 열심히 뜯은 버들강아지의 잎사귀 한 움큼을 내놓는다. 

"우리 아들 돈 많이 벌어왔네~?" 

"네~ 이번엔 만 원짜리가 별로 없어서 천 원짜리를 더 많이 벌었어요"

큰 잎사귀는 만원, 작은 잎사귀는 천 원짜리다.

이상하다. 회사는 남편이 다니는데 돈은 아들이 벌어오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소꿉놀이의 절정은 밥이다.

흐뭇한 척 잎사귀 뭉치를 받아 들고 나는 재빨리 돌로 풀을 찧어 우유팩으로 냇물을 떠서 넣어 막대기로 휘젓는다. 저녁밥이 아닌 디저트를 내놓는다. 소꿉놀이에 밥상을 차리기는 너무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커피랑 녹차 드세요~"

하면 나의 가짜 남편은 흙탕물과 잎사귀 찧은 물을 음미하는 척 입에 갖다 댄다. "딱 좋네." 하면서.

출처 : https://apt-com.tistory.com/371



고로쇠물

아직 진달래가 피기 전에 면 내에 있는 간판도 없이 아이스크림을 팔았던 어떤 이름 없는 가게에서는 말통에 '고로쇠물'이라고 적어서 4통을 팔고 있었다. 

아빠 친구한테 얻어 오신 건지, 그 집에서 산 건지 "약숫물이다. 고로쇠물이다 마셔봐라." 하고 주시는데 어찌나 달콤했는지!  뼈를 이롭게 한다는 뜻의 골리수(樹)라고 하는데 단풍나무과의 수액이다.

냇가의 버들강아지처럼 드디어 고로쇠나무도 한 해를 잘 살아보고자 줄기로 물을 끌어올리고 있는데 하필 이 녀석의 물이 맛있어서 줄기에 구멍이 뚫리고 가지보다 인간이 먼저 영양분을 뽑아 먹는 것이다. 

성인이 된 후 마트에서 고로쇠물이라고 파는 1리터 남짓의 페트병이 있어 사 먹어보았는데 너무 맹숭맹숭하고 달지도 않은 맛이었다. 미각이 변한 것일까, 고로쇠가 지쳐서 더 이상 당분을 뽑지 못한 것일까.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61556&cid=40942&categoryId=32699

뱀이다~!

봄이 되면 뱀도 자주 나온다. 꽃뱀으로 불리는 초록 주황이 섞인 유혈목이 뱀이 그냥 마당을 지나간다.

내가 6살인가 7살 때였던 것 같다. 아빠가 뱀 항아리에  뱀집게로 뱀을 잡아넣는데 몸을 비틀어 저항하다가 도망을 가고 있었다. 늘 뱀은 내 키만 한 뱀 항아리로 갔기 때문에 나는 영웅이 되고 싶었는지 용기 있게 달려가 뱀의 몸통을 밟았다. 

앞이 뚫린 슬리퍼를 신고  "아빠! 배앰~!!' 하는데 뱀의 머리가 내 발 쪽에서 공격을 하려고 했단다.  

"어어~! 발 떼라! 물린다!"

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며 죽을 뻔했다는 생각에 너무 무서워서 얼른 발을 풀고 뱀도 나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망을 갔다.

겁도 없이 맨발로 뱀을 밟냐고 혼이 났다. 

길가에 아무렇게 난 뱀딸기를 맛보고 다시 뱉으며 '이 맛없는 걸 뱀이 좋아한단 말이가?' 하고 되뇌었다.


출처: https://blog.naver.com/myflower114/223109759525

산딸기

뱀딸기는 단맛이 없다. 찔레의 줄기를 껍질 벗겨 씹어 먹어도 단맛은 없다.

진정한 봄의 맛은 산딸기였다.

앞산, 뒷산, 옆산도 모자라 학교 등교하는 마을길 곳곳에 산딸기나무가 있었다. 

아침엔 등교하기 바빴지만 집에 오는 길은 언제나 더 오래 걸렸다.

그 많은 산딸기를 따먹으며 와야 했으니까. 

어제 , 엊그제 따먹은 자리는 알맹이는 빠지고 꼭지와 줄기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 자리에서 따먹는 것으론 감질나서 아예 옆구리에 바구니를 끼고 비탈을 올라갔다. 

길이 아닌 곳에는 더욱 알이 굵은 산딸기가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그러다가 비탈에서 옆으로 몇 바퀴 굴러 떨어져서  다른 나무 둥치에 걸려 구르기를 멈췄다. 팔다리에는 산딸기나무의 가시에 쓸리고 비탈 초목에 긁힌 상처로 할퀴어진 채로 절뚝거리며 반쯤 담긴 딸기바구니를 엄마에게 바쳤다. 먹지 않고 갖다 드리면 다쳤다고 매 맞을 일은 없을 것 같은 계산에 집에 오는 길에는 한알도 먹지 않고 드렸다. 

하루는 하굣길에 산딸기 나뭇잎들이 누렇게 시들어 있었다. 

비 온 것은 아니었지만 산딸기는 더욱 탐스럽게 윤기가 흘렀다.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남동생이랑 내기라도 하듯 서로 더 알 굵은 걸 따서 재보기도 하면서 먹고 집에 왔는데 아빠가 말씀하셨다.

"오늘 제초제 치는 날인데 느그들 집에 오면서 산딸기 같은 거는 안 따먹었제?"

"먹었는데요? 제초제가 뭔데요?"

"농약! 잡초 죽이는 거! 따먹었다고? 얼마나? 빨리 저거, 물먹어라! 칡뿌리차 묵어라! 빨리 씻어 내보내야 된다! 안그라면 병원에 실려 간데이?! "

내 기억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병원. 보건소 보다 두려운 병원!  공포에 질린 나와 동생은 주전자 가득 있는 미지근한 칡차를 배가 터질 때까지 먹고 화장실 가기를 반복했다.

초등 2학년 나이, 별다른 조치 없이 두려움에 눈물을 삐질 내비치며 칡차만 마시고 또마시며 우리는 해독했다. 잎이 누런색이면 절대로 따먹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새기며.


어른이 되어 먹는 산딸기 역시 그때 그 맛이 아니다. 
모든 게 달았던 그때에 비해 상큼한 맛은 있지만 그때만큼 향긋하거나 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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