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친구를 만나는 날은 늘 한 시간 일찍 나와서 편지를 썼다
너를 만나기 시작한 뒤로
내 방에 작은 지진이 살고 있어
나는 참 자판기처럼 살았는데, 인간미 없이
너도 알겠지만 나는 감정을 자판기에서 뽑아 쓰듯 쓰고 살았잖아.
콜라를 누르면 콜라가 나오고
환타를 누르면 환타가 나오는 자판기처럼
적당히 웃음을 뽑아 쓰고
적당히 슬픔을 뽑아 쓰면서
그런데 너를 만나기 시작한 뒤로는
내 방에 지진이 살기 시작해서
내 속이 막 뒤섞이나 봐
콜라를 누를 때도 네가
환타를 누를 때도 네가
모든 버튼에 네가 같이 뽑혀 나와
좋은 것을 보면 그저 좋다고만 생각하던 내가
좋다는 것을 느끼기도 전에 너와 보고 싶다거나
그걸 넘어서서 그냥 네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사실 많이 내색은 안 했지만 힘들거나 슬플 때는 더
그럴 땐 그냥 네 목소리를 듣거나 만나서 꼭 안고 싶어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잖아
나는 슬픔이나 고통을 표출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나는 그런 걸 하나하나 다 표현하고 사는 게
사치인 곳에서 왔는데.. 그래서 그런가, 습관이 그렇게 들어버려서
내 슬픔이나 고통은 왠지 약점 같아서 드러내기가 싫어
난 사람들이 웃을 때 미소보다 송곳니를 먼저 보는 사람인가 봐
이렇게 글로 나를 풀어쓰니 조금 슬프네, 그치.
처음 공황 때문에 쓰러졌을 때 이상하게 마음속에
진짜 이렇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
그게 어찌나 두려운지, 혼자 침대에 누워있다
전화를 걸어서 너무 무서웠다고 너에게 말하는데
꼭 내가 약한 짐승이 되어서 내 목덜미를 보여주는 기분이 들어서
갑자기 또 두려웠어, 숨이 막혀오더라고 그래서 전화를 급하게 끊었던 거고.
그런데 그 날 이후에 내게 건네준 따듯한 말과 품이
내 목덜미를 얼마나 든든하고 따듯하게 덮어줬던지
나 요즘은 늘 꾸던 악몽도 잘 안 꾸잖아. 약을 안 먹어도.
넌 네 꿈의 온도까지 바꿔주더라.
사랑을 품고 다가오는 사람의 온도라는 게 참 신비해, 그치.
처음 내방에 이 작은 지진이 들어왔을 때 나는 그게 조금 어색하고 싫었어
생존을 위해 단단히 구축해둔 "나"라는 시스템에 금이 가는 것 같아서
요즘은 그러니까 네게 내 목덜미를 보여준 그 날 이후로 나는 내방의 작은 지진을 사랑해
나갈 때도 꼭 품 안에 품고 나가 그러니까 이 우르르 쿵쿵한 느낌을 항상 품고 싶어
발밑이 흔들려 양팔을 급히 벌린 팔에 바로 덥석 안겨줄 사람이 있다는 게
혼자서 휘청대며 균형 잡고 사는 삶보다 얼마나 더 안정적인지.
사랑하는 서로가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야, 그치.
오늘은 9월 9일이고 여기는 제주도야
너도 알다시피 금능에 북토크를 하러 왔어
아무것도 없는 조용한 방에 있으니
또 지진이 나서 네 생각을 조용히 종이 위에 나열해 봤어
이걸 다 쓰면 해변으로 걸어 나가 너에게 전화를 걸려구
내일은 9월 10 일이고 네가 여기 오기로 한 날이야
이제 내게 좋은걸 보는 순간은 모두 너를 보는듯한 그리움이야
지금은 9월 9일이고 내 생일 하루 전이야 가장 그리운 것이 내일 와
보고 싶어. 조심해서 와. 사랑해.
여자 친구를 만나는 날은 늘 한 시간 일찍 나와 편지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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