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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가람 Dec 14. 2017

부엌마다 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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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년시절 아침은 해보다 엄마의 손이 더 빨갛게 떠오르며 시작되었다.

눈을 떠 화장실로 들어갈 때면 부엌의 어머니는 늘 쌀을 씻고 있었고

그때 엄마의 찬손은 구름 같은 쌀뜨물 속에 피어오르는 붉은 해 같았다.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라는 시구의 뜻을 한 줄로 외우고 있었지만

우리 집의 말갛게 씻은 해가 솟는걸 보다 보면 마음에 여러 줄이 가버려서

시구 한 줄의 뜻이 이렇게 간단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갛게 얼은 손이 다시 익은 벼색을 띌 때 쯤이면

엄마는 아픈 아빠를 대신해 일을 하러 나갔다.

하루는 학교에 가다 충동적으로 엄마의 식당에 간 적이 있다.

몰래 가게 밖 유리를 통해 식당의 엄마를 훔쳐보는데

엄마의 손이 또 싱크대의 하얀 거품 안을 빨갛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속에서 그 시구가 신물처럼 올라왔다.

싱크대 거품 아래로 가라앉았다 떠오르길 반복하는 내 해는

하루에 너무 자주 떠올라서, 나는 하루에 너무 많은 하루를 구겨 넣어야 했다.

하루가 늘 터져버리기 직전만큼 아팠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매일 겨울로 가 시린 손으로 눈을 퍼오고

그걸 또 얼음장 같은 물로 씻어 포근한 눈밭 같은 밥을 익혀 내었다.

나는 그곳에서 자라났다. 포근한 눈밭에서.


내 따듯한 아침은 왜 가장 차가운 곳에서 오는가.

그것은 내 유년기의 가장 큰 고뇌였지만

요즘은 마음이 시려 급히 따스함을 찾을 때면

늘 태양보다 빨리 떠오르던 엄마의 손이 떠올라 그리 춥지 않아 좋다.

엄마의 손 덕에 마음속에 세밀한 난방체계가 설치되어있다.


사랑을 품은 인간의 복사열은 해보다 빨리 온다.

무엇도 함부로 녹여대지 않으면서, 가장 따스하게.

쌀을 씻는 손들, 부엌마다 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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