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파편들
내 손목에 처음 향수가 뿌려진 건 고등학교 1학년 때다.
엄마에게 남자는 냄새가 나면 안 된다며 선물로 받은 불가리 옴므 향수.
지금 생각하면 우리 엄마도 참 특이한 사람이다.
17살짜리 아들에게 등교할때 뿌리라고 향수를 사주고.
어쨌든 그 덕에 아마도 나는 교내에서 유일하게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남학생이 되었다.
향수를 뿌리기 시작한 뒤로 저녁시간이 되면 손목에서 나는 향수 잔향이 참 좋았다.
교실 창밖 운동장에 태양이 붉은색을 부어댈 때쯤
창밖으로 그걸 바라보는 내 얼굴에 부어지는 바람도
같은 석양빛으로 느껴지게 만들어주는 그 은은한 잔향
눈 감고 그 순간을 즐기는 게 너무 행복했다.
딱 그때쯤부터 향수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 향수를 20살까지 써오다가 20살 때 친구 어머니께서 여행 다녀오며 선물로 주신
디올 미, 디올 미 낫이라는 향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쓰기에는 조금 여성스러운 느낌의 향수
그래서 처음에는 그다지 마음에 안 들었는데
클럽에서 처음 본 여자가 향수 뭐 써요? 냄새 너무 좋다.
라는 뻔한 말 한마디 던진 덕분에 꾸준히 한통 다 썼던 향수.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리면 코끝에 그 향기가 아른거린다.
20살 그저 여자가 좋던 시절의 향기.
물론 지금도 좋아.
향수가 준 최악의 역사 중 하나는 스물세 살 때.
의류학과로 재입학했을 당시.
그때 2년 정도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같이 집에 가는 버스에서 여자친구가 내 폰을 보고 있을 때
뜬금없이 온 같은 학번의 20살짜리 여자애가 보낸 문자 한 통 덕분에
대판 싸우고 결국 나중에는 헤어졌다.
그 여자애가 보낸 문자 내용은
버스안인데 어디선가 오빠 향수 냄새가 나서 너무 좋아요.
그리고 나중에 그 여자애랑 연애했다.
한 1년 반 정도.
그 당시에 썼던 향수는 장 폴 고티에 르말.
여자들이 유난히 좋아했던 향수는 두개가 생각나는데
첫 번째는 클린의 웜코튼
세탁기에 들어가서 빙빙 돌아가다가
뛰쳐나온 사람에게서 날법한 향기가 난다.
예~전에 만났던 여자가 이 향을 참 좋아했는데
헤어지고 긴 시간 뒤에 우연히 만났을 때
이 향수를 뿌리고 다녀서 놀랬다.
그래서 내가 왜 따라 하냐고 장난쳤더니
처음에는 아니라고 빼다가 사실은 헤어지고 나서도
이향은 계속 생각이 나길래 내가 좋아서 생각나는 건지
향수가 좋아서 생각나는 건지 헷갈려서
둘 중에 차라리 향수가 좋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자기가 사서 뿌리고 다녔다고 말했다.
그 말이 아주 인상 깊었다.
두 번째는 샤넬의 알뤼르 옴므 블랑쉐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향이기도 하다.
특별한 이야기는 서려있지 않지만 그냥 다들 대체로 좋아하는 향
가을느낌이 짙은 향수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아저씨 같지도 않고.
이거 뿌린 날은 유동자산 10억 이상의 젊은 전문직 갑부가 된 기분이 든다.
물론 계좌에는 이 향수 한통 살 돈도 없지만.
가장 인상 깊게 떠오르는 여자의 향수는
더 바디샵의 화이트 머스크
그 향수만 쓰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바디 제품부터 향수까지 그것만 쓰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항상 그 향기가 스며든 사람.
그 향 참 섹시한 향기다.
꼭 남녀의 마찰력에 의해 데워진 살에서 피어오르는 향기 같아서
그 향을 맡을때면 묘한 흥분감이 들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헤어진 뒤에도
그 향기를 지나가다 맡게 되면
그 사람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가 다 떠올랐었다.
요즘도 가끔씩 길에 흘려진 그 향기를 맡으면 개가 되기도 한다. 왈왈!
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향기는 사실 특정 향수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목덜미에서 피어오르는 온도감 있는 살냄새다.
그 자극적인 아늑함.
그곳에 코를 박고 있으면 나도 한때는 보호받아야 했던 존재였다는 것을 느낀다.
뭐든 스스로 맞서 싸우고 이겨내고 해내야 하는 그런 투쟁적인 존재가 아니라.
코로 들어와 마음을 꽉 채워 주는 향.
그 살색 향기가 참 좋다.
사랑한것들은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기록이 남고
그것을 서술하여 나열하면 역사가 된다.
이 글은 향수의 역사.
코끝의 기억들.
*사진은 산타마리아노벨라 의 멜로그라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