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대 40
실업계에 갔는데 신의 한수였죠
어렸을 때는 단기적인 목표밖에 없어서
별로 꿈이 없었어요
초등학교 때는 그저 조용한 아이
선생님 말씀 잘 듣는
그래서 선생님이 조심히 불러서
책을 선물해 주시기도 했죠
선생님께서 선택을 하라고 하시더라구요
너 인문계가서 꼴지할래
실업계 가서 상위권에 있을래
결국 실업계에 가게 됐는데 신의 한수가 되었죠
당시, 집도 시골이어서 실업계 가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구요
농업고등학교를 갔어요
그런데 우리학교가 관현악부로 굉장히 유명했던 학교 였던 거죠
짝궁이 트럼펫으로 대학을 가기 위해 입학한 친구였는데
그 열정이 정말 멋있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관현악부에 들어가서 악기를 배우게 됐어요
그 악기들을 배우면서
뜻하지 않게 좋은 기술을 배웠구나 생각했어요
나중에 평범한 군대가 아닌
군악대를 들어 갈 수 있게 되었죠
근데 저는 시골 대학교니까
축제를 하게 되면 시골 모든 사람들이 다 오는 거에요
그리고 저희 역시 학교에 몇 없는 밴드여서 공연을 했는데
제 색소폰이 멋있어 보이셨는지
어느 교회 장로님께서 연락을 주시게 된거죠
자네 내가 악기를 배우고 싶은데 알려 줄 수 있겠나
목사님 귀에 들어가게 된거에요
목사님께서제가 연주하시는 것을 보시더니 그러시더라구요
자네 찬양팀 해볼 생각 없나?
그래서 제 의지와 상관없이
수요일 저녁예배, 금요일 저녁예배, 토요일 레슨, 일요일 아침예배,
시간이 되면 저녁예배까지 자연스럽게 찬양단으로 섬기게 되었죠
비료공장의 8개월
저는 건설도시공학과를 다녔는데
군대를 다녀오고 제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학교를 야간으로 다녔어요
낮에는 일을 다녔구요
주변에 있는 비료공장에서
퇴비가 비료가 되는 과정이다 보니까
굉장히 지저분했고 뭔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작업환경이 있었죠
알콜릭이 셨던 공장장님께서
저에게 치킨에 소주를 알려 주셨고
외국인 노동자 두명
말 못하시는 아저씨
그리고 온몸에 문신이 있던 제 또래 청년과 함께했어요
사실 어떻게 보면 참 암울한 조합이었어요
알콜릭 아저씨에 파리와 모기떼들
정상적인 생각으로 있을 수 없던 곳
하지만 그곳에서 말을 못해도
가장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사시는 모습
타지에 가족을 위한 삶
문신은 있지만 수더분한 마음들을 보며
사람은 환경이 아니라
내가 임하는 마음이 중요하구나를
알게 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네팔로의 초대
서울에 있는 대학원을 지원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제가 있던 대학은 지방에 있지만 국립대여서
등록금이 그때 당시 100만원도 안되었는데
서울에 있는 석사과정은 등록금이 600만원인거에요
그렇게 악기를 팔고 등록금은 마련했는데
서울에 아는 분이 없던 터라...자취를 해야하는 거죠
정말 6개월 동안
캐드만 주구장창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끝날때 쯤에
대학교때 인연이 있던 NGO단체 매니져 분이
연락을 주셨어요
"너 네팔에 가지 않을래" 라며
" 1년 정도인데 네팔 함께 가지 않을래" 라고
제안해 주셧어요
가면 아이들도 있고 거기에서 건물도 지을 수 있고
저번처럼 의미있는 봉사도 할 수 있다며
아빠라고 불러
저는 아동센터운영과 도서관을 만들고
그곳에서 아이들 케어와 도서관 운영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했어요
그곳에는 고아나 삶이 힘든 한부모가정의 아이들 30명 정도가
이미 모여서 생활하고 있다고 현지 직원을 통해 전달받았는데
막상 가니까 진행되고 있던 프로젝트가 없었던 거죠...
최빈국이나 개발도상국과의 사업에서 이런 이슈들이 있다고 듣기는 했는데
막상 경험을 하니 많이 힘들더라구요
직접 돌아다니면서 30명의 아이들을 뽑았어요
그곳에 아동센터를 지으려고 했던게
제가 오기 몇년 전에 내전이 있어서
그 지역에 고아들이 많았거든요
그런 트라우마가 있는 지역이라
아이들에게 심리치료도 많이 해줬었어요
그리고 음악이나 태권도 이런것도 하면서
울고 웃는 시간을 보냈구요
그런 아이들과 2년 동안 있었다보니
정이 안들래야 안들 수 가 없던거죠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었어요
그 의미는 안가르쳐 주고
가장 큰 애가 12살 어린애가 5살
그런 아이들이 혼자 살아가는 삭막한 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아이들이 불러주는 아빠아빠 라는 말에
오히려 저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떠날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날이었어요
제가 별로 안 우는데
정말이지 그날은 눈물이 펑펑 나오더라구요
최근에 재미있는 경험은
네팔 그 꼬맹이들이 이젠 다 커서
페이스북을 하더라구요
그 친구들이 나랑 친구를 맺고 9년 전 사진들
자기가 어렸을때 사진을 보니까 그렇게들 좋아하고
시대가 참 좋아 졌구나 라는 걸 새삼 느꼈죠
이렇게 너희랑도 소통을 할 수 있고
그때 그 모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에
인터뷰 아닌 인터뷰
네팔에서 있을때
조선일보 더나은 미래에서 오셨어요
제가 있던 NGO단체가 10주년이 되었는데
제가 거기에서 공로상을 받게 된거죠
더나은 미래에서 기자님이 오셔서
일주일 동안 동행취재를 하게 되요
그리고 그 취재기사와 MBC에서 네팔에 진행하던
임직원 해외봉사 사업과 시기가 딱 맞아 떨어진거에요
현지 봉사뿐만 아니라 촬영도 하게 되었는데
제가 활동했던 것이 많이 촬영이 되었던 거죠
그러면서 MBC임직원 해외봉사팀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앞으로 저의 계획을 이야기하게 되었어요
저는 다른 NGO 혹은 기업사회헌쪽에 관심이 있는데
언론사의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경험하고 싶다.
그렇게 기회가 주어졌고
그 기회가 지금의 저를 만들었죠
http://www.mbcnanum.co.kr/
개도국에서 국제개발을 하던 사람이
국내 방송사와 국내 사회공헌을 활동을 하게 되는게
처음에는 혼란이 있었어요
국내 소외계층, 장애인, 다문화, 실직 가장, 쪽방촌 어르신 처럼
대상이 확연히 바뀌니 프로세스도 바뀌어야 했구요
그 전까지는 혼자 일했는데
이젠 조직 내에서 활동을 해야 하는 시스템이라 조금 힘들었죠
돌아보면 적응의 시간이 많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베트남 1,750KM
입사하고 나서 첫 해외 일이 주어졌는데
베트남에서 국토 종단하는 다큐 2부작을 기획하게 되었어요
호치민에서 하노이 까지 남에서 북으로 1, 750km를
자전거를 타고 종단하는 거죠
한국대표 10명, 베트남 대표 10명으로 구성되었어요
고엽제 환자, 다문화 가정, 베트남 유학생, 연예인,
그리고 K pop좋아하는 친구들까지 함께 어울려 팀을 만들었죠
사전 기획 두달, 자전거 횡단은 한달
한번에 움직이는 스텝이 80명정도니까
거의 한꺼번에 100명이 움직이는 10억짜리 대형 프로젝트였죠
큰 도시에는 은행이 있는데 작은 도시에는 은행이 없어서
현금으로 천만원, 이천만원을 들고 다녔어요
잘 때는 정말 끌어안고 잤죠
나중에는 회계직원한테 칭찬을 받았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하나도 빼먹지 않고
10억짜리 전표를 빼곡히 쳐서 드렸으니까
인생퍼즐이 어떻게 되시나요?
제가 네팔에서 배웠던 것은
인내하고 버티는거 였어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버틸수 있는 체력적인 면까지
그 덕분에 인생의 퍼즐들이 하나둘씩 맞춰졌고
지금도 그 과정이기는 하지만 그 과정의 퍼즐이
다른사람 보다는 많아졌다는 것을 새삼 느껴요
다른사람은 100피스짜리 퍼즐이라면
저는 300피스짜리 퍼즐 정도?
공부에 얽매이지 말고
좋아하는게 있으면 남들보다
한두발자국 먼저 가봤으면 좋겠어요
스펙보다는 자신감
그리고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기만이 내면에 품고 있는
무엇인가를 계속 이어가면서 만들어 가는게 중요해요
사실 그런 인재가
사회에서는 더 오래가니까요
Q. 청년을 위한 DREAM매뉴얼
저는 항상 60 대 40 이에요
좋아하는게 60
싫어하는게 40
모든게 다 좋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 20의 차이가
삶의 가치를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