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한 모서리를 만져 보는 것

2011년의 책들 2. 여덟번째 방

by 루빈

이번에 소개할 책은 김미월 작가님의 <여덟 번째 방>이라는 책이다. 김미월 작가님의 팬이었던 시절이 있다. 홍대에 있는 카페에 있는 작가와의 만남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 만난 작가님은 친근하고 다정한 느낌이어서 호감이 커지기도 했다. 그날 돌아오는 길의 달이 예뻐서 ‘두 개의 아름다운 달(미월)을 만났다’는 감상적인 말을 다음날 모닝페이지에 적었던 걸 보면 어지간히 마음이 달떴던 모양이다.

<여덟 번째 방>은 제목에서처럼 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대라는 남자주인공이 생애 최초로 자취방에 들어선다. 자취방의 입지는 남루하기 짝이 없고 직장을 구하는 일도 여자친구를 사귀는 일도 좀처럼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남다른 취미가 하나 생긴다. 그의 방을 예전에 사용하던 여자(주인공 김지영)가 남겨두고 간 일기장이다. 일기장에서는 김지영이 머문 방들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두 살, 청춘의 계단을 밟고 이사를 다닐 때마다 조금씩 좁아지고 낮아지고 어두워졌던 방들. 문이 잘 닫히지 않던 방, 저녁마다 서향으로 난 창에 노을이 번지던 방, 장마 때면 침대 다리가 물에 잠기던 방, 정전이 잦던 방, 그가 들어오고 싶어했던 방, 방, 방들.

그 많은 방들에 나는 내 20대를 골고루 부려 놓았다. 나에게 방은 집에 부속된 공간이 아니라 온전한 집 자체였다. 부등식 ‘방<집’ 이 아니라 등식 ‘방=집’이 성립되는 곳이었다. 그 많은 방들을 거치며 이제 나는 서른이 되었다. 요즘도 가끔 지나온 길 위에 두고 온 나만의 방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곤 한다. 방들 속에 고여 있는 기쁨과 슬픔과 꿈과 절망과 환희와 분노는 하나같이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말랑말랑해진 그 모서리들을 만져 보는 것이 나는 좋았다.


--------사실 나는 많은 방들을 옮겨 다니지도 않았고 방에 큰 의미를 부여한 적도 없다. 어떤 방에서의 어떤 고민과 다짐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 기억에서 중요한 것은 생각과 감정이지, 방 쪽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을 기억하고 싶은 이유는 특히 마지막 두 문장 때문이다. 방들 속에 담긴 수많은 감정은 하나같이 모서리가 닳아 있고 낡아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그 허름해진 모서리를 포근하게 느끼면서 만져보는 행위에 애착을 느낀다는 점이 와 닿았다. 조금 거리가 있을지 몰라도 이런 느낌이다. 지난날의 나는 모르는 것도, 안 해 본 것도 많았고, 많은 것을 더 생생하고 강렬하게 느꼈다.


그래서 더 아프고 힘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지난날이 그립고 지난날의 내가 사랑스러운 것이다. ‘지나고 보면 그때가 좋았다. 아름다웠다.’ 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가끔은 미래에서 지금을 보려고 해본다. 그럼 오늘도 좋은 날이고 아름답다고 느낄 거야 라고 믿으면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나에게 별다른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인생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는 것을,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그래서 나의 미래가 내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관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일기장에 썼다. 생각만 하는 것과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은 차원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나는 후자가 내게 선사하는 쾌락과 위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덕분에 불면의 밤으로부터도 점차 해방될 수 있었다.

[...]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기를 쓰는 동안만큼은 단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좋았다. 나는 일기 쓰기에 더욱 몰두했다. 그렇게 내 20대는 천천히 흘러갔다. 내가 좋아하지만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 사람에 대한 갈망과 함께, 아직 내 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형체 없는 꿈과 함께.

-------영대가 읽은 일기장 속의 주인공 지영은 오랜 친구 관을 연모하다 멀어진다. 지영은 실연당했다고 느낀다. 실연의 아픔 속에서 그녀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나 역시 (아침에) 일기를 쓰기 시작하며 불면의 밤에서 탈출했다. 일기, 아니, 모닝페이지를 쓰며 위안을 느꼈다


글에는 이런 치유의 효과가 있는가 싶어 위의 문장들을 다시금 곱씹어 본다. 20대에는 내 미래나 내가 원하는 것을 알기가 더 힘들지 싶다가도 한편으로 중년인 지금은 또 그런 것을 얼마나 더 잘 알게 되었나 싶기도 하다. 이미 수다가 긴 것 같지만 한 부분만 더 보겠다.


영대의 첫 번째 방. 문이 활짝 열려 있으나 불은 켜 있지 않은 그 방은 앞으로 영대가 걸어가야 할 길이요, 부딪혀야 할 세상처럼 아득하고 컴컴하기만 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이렇다 할 꿈도 없고 열심히 살았던 적도 있지만 어쨌거나 이대로 끝은 아니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영대가 걸어가야 할 길, 부딪혀야 할 세상에 지영의 일기장이 힘을 실어주는 것 같은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서로 상관이 없는 것 같은 두 사람이지만 일기를 통해 연결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글이란 어쩌면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에게 건너가 어떤 움직임을, 어떤 영향력을 일으킬 때 그 의미가 살아나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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