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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May 22. 2024

고독이 당신에게 주는 3가지 시간

[잡담술집] 1화

"안녕하세요. 한 명이요."

수 겹의 지문이 쌓였을 가게 문이 세월의 신음을 내며 앞으로 밀려졌다. 그는 이미 축축해져 있는 발판에 발을 문지르며 나무통에 우산을 꽂았다.


멀끔하게 생긴 얼굴과는 다르게 그의 착장은 편해 보였다. 남색 플리스 점퍼 아래 길게 뻗은 연회색 바지는 제법 즐겨 입는 옷인 듯 무릎 언저리 가 늘어나 있었다. 그는 오른쪽 가장자리부터 두 번째 되는 자리에 앉았다. 작업테이블 아래로 서랍을 뒤적이고 있던 바텐더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바텐더의 움직임에 따라 번들거리는 그의 명찰에는 '브라운'이라고 적혀있었다.


"같은 걸로 드리면 되죠?"

"네. 부탁드려요."

바텐더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납장으로 몸을 돌렸다. 수납장은 거친 나뭇결 위로 곳곳에 니스가 벗겨져 있었다. 그는 플리스 점퍼를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바텐더는 수납장 문을 닫고 빳빳하게 말려진 린넨으로 유리잔에 얹힌 먼지를 쓸었다.

"이 잔이 좋겠군."

바텐더는 잔을 내려다보며 안으로 투과되는 빛을 바라보았다. 유리잔은 밖에서 보면 검은색이지만 내부로 시선을 두면 모든 빛을 담아내는 투명색이었다.

바텐더의 손기술을 보기 위해 그는 고개를 들었다. 단순히 유리잔에 얼음을 넣고 술을 부어 넣는 순서지만, 우아하면서도 거친 바텐더의 제스처는 언제나 자신의 시선을 빼앗았다.


바텐더는 그에게 잔을 건네며 말했다.

"부디 기분 좋은 취기가 오길."

"고마워요, 젝스."

젝스는 그에게 몸을 가까이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제 본명을 말하면 어떡해요. 전 브라운이랍니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고 잔을 들었다. 그때 잔 안으로 빛이 내려졌다.

"안을 들여다봐야만 이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분명 검은색이었던 잔은 바다 위로 노을 진 주황빛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한 모금 들이켰다. 잔을 내리고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았을 때, 18년의 긴 시간을 삼킨 위스키는 그의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가 신체의 모든 구석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그는 앞에 놓인 초콜릿을 베어 물었다. 연유 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초콜릿은 침에 닿자 혀의 모든 유두를 감쌌다.

"역시, 위스키엔 초콜릿이지."

그는 다시 잔을 들어 위스키를 머금고 입을 헹궜다. 그러고는 눈을 감아 포갠 두 손 위로 고개를 실었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게 들리는 걸로 보아 젝스는 설거지에 몰두 중인 듯했다. 그는 그릇들이 서로 맞물리는 소리를 들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술이란 건 정말 매혹적이에요. 현실적인 무게와 잠시 이별하게 하잖아요. 이렇게 홀로 술을 마실 때면 현실이라는 지구에서 몽환이라는 외딴 행성으로 혼자 여행 온 것만 같아요. 분명 취했는데도 조용해지고 차분해져요."


젝스는 세척기 뚜껑을 위로 젖혔다. 뿌연 김과 함께 깨끗해진 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젝스는 린넨으로 손을 감싸고 조심스럽게 잔을 꺼내 작업 테이블 위로 옮겼다. 긴장감이 가득한 젝스와는 다르게 그는 웃으며 말했다.

"뭐, 가끔은 너무 조용해서 고독감을 느낄 때도 있지만요."


젝스는 작업테이블 위로 옮겨진 잔을 들어 남은 먼지와 미처 증발하지 못한 물기를 살폈다. 보울 안쪽으로 찬 습기가 보였다. 린넨을 뭉쳐 아기 입가에 묻은 젖방울을 닦 듯 살살 두드렸다. 잘 닦여진 잔은 자신의 오른쪽에, 아직 닦이지 않은 잔은 왼쪽에 두었다. 왼쪽의 잔들은 세례를 기다리듯 깨끗해지기를 염원하며 조명을 이용해 자신의 남은 물기를 강하게 들어냈다.


젝스는 왼쪽에 있던 잔의 스템을 잡으며 말했다.

"전 그 고독을 참 좋아하지요."

그는 고개를 들어 젝스를 바라보았다.

"고독의 어떤 면을 좋아하는 건가요?"

"하하, 좋은 질문이네요. 어떤 면이라…"

젝스는 짧게 난 턱수염을 만졌다. 구레나룻까지 연결되어 있는 수염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고독에는 3가지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젝스는 들었던 잔을 내려놓고 허리를 굽어 테이블 위로 손을 짚었다.

"첫 째는, 외로움이에요. 말 그대로 혼자 감량해야 하는 시간이죠. 둘 째는, 자신의 매력을 만드는 시간이에요."

잠시 말을 멈추고 선반 끝에 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그대로 둔 채 말을 이었다.

"셋째는, 다른 의미의 고독(考讀)이에요. 본래 저희가 알고 있는 고독(孤獨)과는 다른 한자지만 여기서 제가 말하는 고독은 '깊이 생각하며 읽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같은 소리인데도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게 신기하죠?"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고르자면 고독의 세 번째 면을 가장 좋아해요. 마치 독서하는 것처럼 제 마음을 읽게 되니까요.“

젝스는 고개를 들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고독은 저희에게 대체될 수 없는 3가지 시간을 선물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러한 고독의 면을 모두 합치면 상상 이상의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말이 끝난 젝스는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는 검은색 잔을 바라보며 젝스가 했을 말을 조용히 되뇌었다.

"고독이 주는 3가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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