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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May 24. 2024

우울이 눈을 가려 보지 못했던 것

[잡담술집] 3화

"안녕하세요."

그들의 뒤로 풍경이 울렸다. 젝스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신호였다.


"어서 오세요. 한분이신가요?"

가슴을 넘어 명치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머리, 하얀 피부에 쌍꺼풀 없는 그녀는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네. 혼자서도 마실 수 있나요?"

"그럼요. 편하신 자리에 앉으세요."


그녀는 그와 한 좌석 간격을 띄고 왼쪽 자리에 앉았다. 젝스는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

"원하신다면 손님과 어울리는 술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답니다."

그녀는 3장 정도 되는 메뉴판을 두 번이나 정독했지만, 마땅히 눈에 들어오는 술 없었다. 결국 손을 들고 젝스를 불렀다.

"브라운, 아무래도 저를 위한 술을 부탁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메뉴판을 돌려주며 말했다.

"오늘은 좀처럼 뭘 마셔야 할지 모르겠네요."

"제가 찾아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젝스는 수납장을 열고 그녀에게 어울릴 잔을 살폈다. 술을 부탁받을 때면 손님의 밤이 담길 잔을 먼저 찾고 잔에 향수를 새길 술을 다음으로 골랐다.

"이게 좋겠다."

림이 좁고 보울이 넓은 잔이었다. 디자인은 평범했지만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신선함이 있었다. 연갈색의 잔에는 나무 특유의 무늬가 아름다운 곡선으로 박혀있었다. 젝스는 초록색 위스키병을 꺼내 잔에 따랐다.

"부디 찾던 취기가 맞길."

"잔이 특이하네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잔의 스템을 만졌다. 생각보다 얇게 빠진 스템은 자칫 부러질 것 같았지만 아래로 넓게 빠진 베이스가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잔을 코에 가까이 대고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건…"

젝스는 그녀에게 초콜릿을 건네며 말했다.

"편백나무로 만들어진 잔이에요. 신기하죠?"

그녀는 잔을 받침대에 내려놓고 젝스를 바라보았다.

"편백나무에서는 다른 나무에서 맡아볼 수 없는 특유의 향이 나요. 오늘 손님에게 필요한 향이라고 생각했어요. 위스키를 입안에 가두고 조금만 기다리면 편백나무의 향이 기분을 더해줄 거예요."

"고마워요, 브라운."


그녀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물었다. 위스키의 오크통 스모키 향 위로 편백나무의 진액이 한 방울 섞인 듯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젖은 나무에 둘러 쌓인 채 비의 여운을 보내지 못한 안개가 두 뺨을 스치는 것 같았다. 피우다 이내 꺼져버린 장작 탄내가 코 끝에 닿았을 때 그녀는 눈을 뜨고 다시 잔을 바라보았다. 위스키에 감돌던 빛줄기는 식어버린 장작에 묻은 이슬이 되어 있었다.


“놀라워요. 원래 제가 알고 있던 맛과는 전혀 달라요. 잔이 이렇게나 중요한 거였군요.”

젝스는 코끝을 손으로 쓸며 말했다.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녀는 잔을 내려두고 수납장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다양한 잔이 많은 것 같아요."


수납장 유리창 너머로 모양과 색이 모두 다른 잔들이 나름의 순서를 지니고 진열되어 있었다.  

"네. 잔을 모으는 게 제 취미거든요. 어떤 잔에 담느냐에 따라 술의 모양이 달라지는 게 흥미로워서요. 잔에 따라 술의 색이 변하기도 하고, 형태가 달라지기도 하고, 지금 손님이 느끼신 것처럼 향과 맛이 달라지기도 하죠. 그 점이 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 같아요."


젝스는 수납장을 손으로 쓸었다. 나이 든 나뭇결이 곱게 다듬어져 있어 감촉이 좋았다. 니스가 벗겨져 거칠어진 부위마저도 젝스는 부드럽다고 생각했다.

"모은다는 게 벌써 이만큼이나 됐네요."

젝스의 표정과 손길을 통해 수납장에 대한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브라운만의 보물이네요."

"그런 셈이죠. 더불어 손님에게 어울리는 잔을 추천하는 것도 제 소소한 행복이랍니다."

"브라운의 취미가 지금의 저에겐 기쁨이 되었어요. 멋진 잔과 술을 추천해 줘서 고마워요."


젝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옮겼다.  

가게 곳곳에는 다양한 장르의 책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 선반 아래로 힘없이 매달려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책을 집었다. 떨어질 것 같아서였는지, 유독 낡은 표지가 궁금해서였는지는 그녀조차 알 수 없었다.


책의 제목은 [우울]이었다. 테이블 위로 축 늘어져 있는 식탁등은 그녀의 손등을 건너 책 표지를 노랗게 비추었다. 대략 9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은 부담 없이 읽기 좋아 보였다. 그녀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오랜만에 책에 취해볼까."

그녀는 종종 혼자 술을 마시며 책을 읽었다. 22살,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책을 보고 시작하게 된 그녀만의 취미였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와타나베라는 주인공은 늘 홀로 독한 술을 마시며 [위대한 게츠비]를 읽곤 했다. 그녀는 그런 주인공의 행동에 호기심을 느껴 똑같이 독한 술을 마시고 책을 읽었다.


취기로 몸이 흔들거렸을 때는 주인공의 시각을 얻을 수 있었고, 손 끝의 체온이 뜨거워졌을 때는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까지 취해 버렸을 때, 그녀는 주인공과 대화하게 되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왜 그토록 주인공이 혼자 독한 술을 마시며 책을 읽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시간이 날 때면 술을 마시며 주인공, 그리고 책의 저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울]이란 책은 제법 굴러다닌 모양인지 손때와 누런 자국이 진하게 묻어있었다. 문뜩 책의 사연이 궁금했다. 어떤 이에게 읽혔고, 어떤 이에게 버림받게 된 건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궁금했다.

"우울이라."

책의 표지를 넘겼다. 노란빛을 내던 표지는 갓 나은 달걀을 품에서 꺼내듯 뽀얀 알맹이를 내보였다. 하얀 종이 위로 검은색 글씨는 짙은 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지만 읽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그녀가 첫 번째 책장을 넘기자 그녀의 주위는 침 없는 전자시계처럼 모두 소리 없이 제자리에서 흐려졌다.

글을 넘기는 소리가 쌓여 자신만의 성을 만들었을 때 그녀는 책을 내려놓았다. 첫 번째 챕터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우울증은 감기 같아서 언제든 겪을 수 있고 언제든 다시 나을 수 있다. 그러니 심하지 않다면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

우울을 병이 아닌 자연스러운 증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위스키를 베어 물고 다시 책을 들었다.


저자는 인생을 '여행'이라 말하고 있었다.

'우울증이 있는지 없는지는 사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인생은 여행이기에 우울이 삶을 침범하지 않을 정도로만 조절하면 된다. 우울에 집중한 나머지 중요한 것을 흐리면 안 된다.'


'그럼 즐거운 여행 되시길'이라는 글을 마무리로 책의 두 번째 챕터가 끝이 났다. 그녀는 언젠가 젝스가 두고 갔을 과자를 바라보며 책 표지를 손으로 쓸었다.

"'우울'에 집중하면 '여행'이 흐려진다는 건가."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 저자의 목소리에 담긴 메시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의 잔으로 굴절 없이 투과되는 빛의 양이 더 많아졌을 때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우울'을 흐리면 '여행'이 또렷해다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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