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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l 26. 2024

왜 이사람에게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까?

06. 지속적인 관계의 두려움

[강릉에서 3일 차]




"맛이 어때요?"

나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다름아닌 [블루워커]를 주문했던 여성이었다. 내가 본인의 술을 따라 주문했던 걸 봤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네, 네. 향이 좋더라고요."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웃어 보였다.

"혼자 오셨어요?"

"네."

그녀도 나를 따라 웃으며 물었다.

"같이 마실래요? 저도 혼자거든요."

여성에게 합석을 권유받은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타지에서 모르는 사람과의 합석이라니. 긴장이 다시 몸을 타고 심장을 뛰게 했다. 이번엔 설렘으로 인한 떨림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잔을 들고 옆으로 앉았다. 검은색 긴 생 머리에 속쌍꺼풀이 귀여운 여성이었다. 나보다 훨씬 아담한 체형이었지만 중저음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고풍지게 만들었다. 우리는 함께 잔을 부딪혀 순간의 시간을 공유했다. 그녀는 강릉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죽 살고 있는 현지인이었다. 종종 혼술을 즐겨했고, 오늘은 왜인지 나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고 했다. 사람을 꺼려하는 나지만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가 포근해서 였을까, 그녀와 오고가는 말들이 편하고 즐거웠다.    


Q. 왜 이사람에게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까?

나는 늘 열등감에 시달렸다. 조금의 대화를 나눠도 금방 혼자 주눅들어하고 상대를 버거워 했다. 그러나 왜인지 그녀와는 진정한 대화가 오갔다.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답은 의외로 간단히 떠올랐다. '나에 대해 아는게 없기 때문' 이었다. 마찬가지로 나도 그녀에 대해 아는게 없기 때문이었다. 열등감을 느끼려면 상대방에 대한 기본 정도가 필요하다. 나는 지금 그녀에 대한 나이, 학벌, 전공, 취미 등 그 어떠한 것도 모르기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Q. 왜 이사람과는 대화가 편한걸까?

우리는 더 많은 술잔을 기우리며 서로의 고민도 공유하기 시작했다. 원채 본인대해 말하지 않는 나지만 왜 그녀에게는 이토록 입이 쉽게 열려 버린 걸까, 이 역시 같은 이유였다. '나에 대해 아는게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픔이나 고민을 지인에게 말하지 않는다. 이유는 '나의 아픔은 곧 나의 약점이 되기 때문' 이었다. 나의 고민은 곧 상대방이 나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기 때문이었다. 가슴 쓰리지만 현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서로에게 그저 여행 중 만난 사람일 뿐이었다. 서로에 대해 평가할 일도, 가르칠 일도 없었다. 그래서 시원하게 입이 터져버린 것이었다.


그동안 혼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겁내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녀와 대화하는게 좋았고 즐거웠다. 서로의 가치관과 생각을 공유 내 머릿속 개미 집을 터 간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래, 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사람들과 가치관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대화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대화를 나누는 주체인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Q. 나는 '사람'을 좋아할까?

'나는 원래 사람을 좋아하는데, 열등감 때문에 싫어한다고 착각한 건 아닐까?'

어려운 질문이다. 답변을 내리기 힘들었다. 한참을 생각하다 그녀가 건넨 초콜릿을 입에 물자 문뜩 떠올랐다.

'사람은 좋아하지만, 지속적인 관계를 어려워 하는구나.'

지금껏 너무나 많은 배신을 당해왔다. 믿었던 왕따에게 배신을 당한것도 한몫 했지만, 그 밖에도 살면서 많은 데임을 겪었다. 영원할 것 같은 관계는 끝이 나고, 최선을 다한 관계는 부지고 말았다. 그 사람을 알 수록 더러운 이면을 보게 되었고, 관계를 지속할 수록 주는 정이 많아져 그만큼 상실이 컸다. 나의 속살을 보여줄 수록 그것을 이용하기에 급급했고, 나의 나약함을 보여줄 수록 하대하며 채찍질했다. 지속적인 관계는 결국 산 정상에서 떨어지는 바위덩어리였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를 두려워 했고 지금껏 피했던 것이었다. 나는 원래 사람을 좋아했던 것이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다만, 지속적인 관계에 두려움이 있다.


Q. '사람'을 왜 좋아할까?

단순히 대화를 하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그들이 건네는 사랑을 받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사람을 좋아했고, 그래서 아파했다. 누군가의 사랑을 통해 태어난 우리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사랑받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은 사랑받고 싶어한다. 모든 사람은 사람을 좋아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나와 같은 이유로 상실의 아픔을 알게 되었기에, 사랑받기를 피하면서까지 타인에게 도망친 것이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우리는 서로의 여정을 보내기 위해 헤어졌다. 세수를 하고 침대에 엎어졌다. 내려갔던 취기가 수평이 된 몸을 따라 머리로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역함이 아닌 기분 좋은 몽롱함이었다. 베개에서는 세탁소에서 날법한 포근한 스팀향이 났다.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오늘은 무척이나 오랜만에 진정한 대화를 한 날이었다. 그토록 바랐던 아무 조건 없이 서로의 이야기에만 집중한 날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런 대화를 나누면 얼마나 더 기쁠까.'

열등감을 극복하고 나서의 내 모습을 미리 맛본 기분이다. 는 그대로 이불을 덥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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