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좋아 밖을 한참 구경했다. 그렇게 밖에서도 저녁을 먹으려 했지만 오후 7시, 강릉 이곳저곳은 벌써 셔터를 내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 여자 혼자 돌아다니는 것도 위험한 듯싶어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편의점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그렇게 숙소 건물에 들어선 그때 강렬한 제즈가 들려왔다. 숙소 바로 아래층의 작은 LP 바였다. 내 발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곧바로 몸을 틀어 가게 문을 열었다.
혼술은 처음이라 긴장되긴 했지만 다행히 모든 손님들이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혼술 중이라 신기하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바텐더 앞으로 길게 늘어난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무작정 들어선 가게는 안주 없이 위스키만 판매하는 위스키 전문점이었다. 나는 아직 떨리는 심장을 풀어줄 겸 [잭다니엘스]를 주문했다. 바텐더는 짧게 난 수염이 잘 어울리는 중년 남성이었다. 바텐더는 내게 초콜릿을 주며 잠시 기다려 달라 말했다.
Q. 나는 어떨 때 안정을 느낄까?
가만히 앉아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다. 가만히 앉아 주변을 떠도는 주황빛을 바라보았다. 음악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조용했다. 모든 것들은 그야말로 '적막'이었다. 왜인지 마음이 편하고 안정적이었다.이곳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이 맛을 알았던 걸까, 여전히 고독을 씹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도 그들과 함께 갈색 배경 영화를 찍는 것 같아 설레어 왔다.
나는 적막을 좋아한다. 나는 홀로일 때 안정을 느낀다.
노트를 꺼내 나에 대해 쓰고 있을 때 앞으로 [잭다니엘스]가 놓였다. 바텐더는 그새 빈 초콜릿을 리필해 주며 작은 노트를 가져다주었다.
"신청하고 싶으신 노래 있으면 써주세요."
바텐더 뒤로 겹겹이 쌓여있는 LP판이 보였다. 손때와 정이 가득 묻은 바텐더만의 음악상자였다.
팬을 쥐고 노트를 손 아래 두었지만, 도통 적을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며 위스키를 들었다. 입을 적시고 잔을 내려놓을 때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노래가 떠올랐다. 故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였다. 내가 신청한 노래는 세 번째 잔을 들었을 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카트리지가 먼지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故김광석의 목소리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신기하게도 지금은 열등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물론 드문드문 아무개가 떠오르긴 했지만, 마음이 쑤시거나 아파오진 않았다. 궁금했다. 나는 과연 어떤 상황에 열등감을 느끼고, 어떤 상황에 마음이 괜찮아지는가. 네 번째 잔을 내려놓자 취기가 목을 타고 볼에 전해졌다. 그대로 눈을 감고 생각했다.
Q. 너는 어떤 상황일 때 열등감을 느껴?
-혼자 방에 틀어박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릴 때
-아무개의 소식을 듣거나 사진을 봤을 때
-공부를 잘하는 친구를 만났을 때
-내가 못하는 무언가를 누군가가 해 냈을 때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가꾸는 사람을 볼 때
전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분명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는 순간도 있었다. 그때는 언제였을까?
Q. 너는 어떤 상황일 때 마음이 괜찮아?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
-작지만 어떠한 도전을 하고 있을 때
-지금처럼 다수가 함께하지만 적막이 흐를 때
사실, 마음이 괴로울 때가 현저히 많았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마음이 괜찮은지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쥐어짜도 위의 3가지가 전부였다.
사실, 지금 여유와 평화를 느끼고 있다 말해도, 아무개는 계속해서 떠올랐다. 어제 서핑보드에 몸을 맡기며 바람을 느꼈을 때도 아무개를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분명 여유와 평화를 느끼고 있는 와중에도 힘들어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전혀 열등감을 느껴야 할 상황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Q. 열등감을 느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걸까?
길게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나는 내가 만들어 둔 '열등감'이라는 철창에 스스로를 가둔 것이었다. 행복하지만, 미소가 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너는 열등감을 느껴야 해. 그렇게 괴로워해야 해.'
어제도 오늘도 아니, 난 10년 동안 본인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노력해도 열등감에서 해방될 수 없었던 거였다. 내가 나에게 건 '열등감'에 세뇌당한 것이었다.
왜 자신은 자신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걸까. 학교 폭력 피해자였던 나는 어느덧 가해자가 되어 다시 나에게 폭력을 행하고 있었다. 너무 늦었지만, 그래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조용히 본인에게 속삭였다.
"미안해. 너를 가장 괴롭혔던 건 나였구나."
LP플레이어에서 나오는 노래가 너무 감미로웠던 걸까, 눈물이 맺히고 이내 따뜻하고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나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존재였어. 그저 내가 내린 저주일 뿐이었어.'
깨달음의 눈물은 턱을 타고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적어도 이제는 본인에게 저주하지 말자
나는 나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는 본인을 저주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누구보다도 행복을 빌어 주기로 했다. 물론 10년의 습관을 한 번에 고칠 수는 없을 것이다. 10년 동안 내려졌던 저주가 한 번에 말끔히 지워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라푼젤처럼 머리카락을 이용해서라도 나는 지하로 뻗어진 성에서 탈출해야 한다.
흘렀던 눈물을 닦고 잔을 들었다. 어느새 잔은 비어 있었다.
"조니워커 주세요."
그때 옆으로 누군가 주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위스키라곤 [잭다니엘스]밖에 몰랐던 나는 따라서 같은 위스키로 주문했다. 처음 마셔본 [조니워커]는 목을 아찔하게 태우긴 했지만 짙은 향으로 혀에 여운을 남겼다. 그렇게 잔을 반쯤 비워냈을 때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