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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Aug 01. 2024

[강릉에서 나에게 쓰는 편지]

[열등감 이별여행] 7화

[강릉에서 마지막 날]




강릉 문구점에 들어서 이쁜 편지지를 골랐다. 내가 나에게 쓰기 위한 편지지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2년에 한두 번씩 본인에게 편지를 썼다. 'Dear. Me. From. Me'라는 초록색 파일에 보관되어 있는, 지금도 가끔 열어보는 9장의 편지들. 아무 생각 없이 적어 내린 편지가 좋아 나중에도 생각날 때면 쓰곤 했던 편지들. 지금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자산이 되었다. 물론 편지를 적어 내릴 때마다 오글거림은 도통 적응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Q. 본인에게 편지를 쓴다고?

언젠가 마음이 무척 괴로운 날이 있었다. 우울감이 맨홀에 빠져 하염없이 추락하던 날이었다. 어디에도 내 편은 없다고, 결국 없었다고 눈시울 붉어지도록 엉엉 울어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어깨를 들썩이다 휴지를 집으려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서랍 맨 안쪽에 꽂혀있던 초록 파일이 눈에 들어왔다. 파일 색이 너무 강렬했던 걸까, 왜인지 첫 장부터 천천히 읽어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의 삐뚤빼뚤한 글씨채와 엉성한 자화상을 보자니 웃음이 났다. 분명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울고 있던 사람이 피식대고 있었다. 이어 다음장, 그리고 그 다음장을 계속 읽어갔다. 마지막장을 읽어내고 파일을 닫았을 때 나는 좀 전과는 다른 미소를 지었다.

파일 안에는 어린 시절의 내가, 방황하는 내가, 사춘기를 겪는 내가, 어느새 성숙해진 내가 들어있었다. 모두 다른 상황에서 다른 걸 느끼며 미래의 나에게 현재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줄에 공통으로 하고 있는 말이 있었다.

지금 어떤 상황이든 늘 너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해. 누구보다도 사랑해!


당시에는 멋모르고 썼던 말이 눈물을 흐르게 만들었다. 이번엔 우울의 눈물이 아닌 분명 감격의 눈물이었다. 혼자라고 생각했던 본인에게는 이미 수많은 과거의 내가 그 자리 그대로 서서 묵묵히 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나를 사랑하는 과거의 내가 여전히 지금도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과거의 나' 들이 모두 모여 쭈그려 앉아 있는 나를 아무 말 없이 꼭 안아주는 것 같았다. 무척이나 따뜻했다. 그래서 오늘도 편지를 쓴다. 여전히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가끔, 늘, 언제나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본인을 위해서 말이다.


치즈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노란 편지지를 골랐다. 강릉을 대표하는 시원한 바다풍을 사고 싶었지만, 치즈 캐릭터의 초롱거리는 눈빛에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그렇게 편지지를 사고 골목길의 조용한 카페로 들어섰다. 손님이 나밖에 없는, 사장님은 어디엔가 숨어있는, 현관문을 떼다가 테이블로 쓰고 있는, 조금은 독특한 카페였다. 어찌어찌 사장님을 찾아 루이보스 티와 초콜릿 케이크를 골랐다. 그리고 현관문 테이블에 편지지를 펼치고 펜을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지난 강릉에서의 3박 4일을 떠올려 보았다. 혼자 무작정 강릉행 버스를 끊었고, 처음 배워본 서핑에서 집중하는 방법을 배웠다. LP와 위스키에 취해 적막의 참맛을 알게 되었고 모르는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 안정감을 느꼈다.

그동안 감춰왔던 열등감을 직면했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되짚어 보았다. 열등감에 감춰져 쓰러져있던 본인을 발견했고 천천히 나에게 다가갔다. 스스로에 대해 아는 게 없던 나는, 이제 본인을 똑바로 직시하고 궁금해하고 있다.

발을 딛지 않았으면 몰랐을, 겁내고 도망쳤다면 몰랐을 나를 알게 되었다. 물론 아직 모르는 것 투성지만, 아직 열등감 투성이지만 멋진 첫걸음을 디뎠다.


'어떤 말을 쓰면 좋을 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쉽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 들어 밖을 보았다.

활짝 열려 있는 카페 문 너머로 일렁이는 햇빛이 보였다. 얇은 날개를 피고 뭐가 그리 궁금한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나비가 보였다. 길을 잘못 들어선 어느 연인이 다시 몸을 트는 모습이 보였다.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니, 나도 자연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평온하고 안정적인 기분.

다시 고개를 내리고 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을 천천히 적어 내렸다.




[강릉에서, 친애하는 나에게]


Dear. 나

노을아 안녕. 오랜만에 너에게 편지를 써본다.
지금은 2022년 9월 10일 추석이야.
이번에 살면서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왔어.
'혼자 오는 여행이라 심심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는데 웬걸! 혼자서도 엄청 잘 놀더라.
타인 없이도 재밌을 수 있는 사람, 타인 없이도 쉴 수 있는 사람, 그게 가능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어.

이번 강릉여행은 정말 완벽했어. 9월이지만 춥지 않았던 날씨, 낑낑대던 나를 도와 서핑복을 입혀주셨던 어머님들, 둘째 날 밤 우연히 보게 된 폭죽, 그날 높이 떠오른 빨간 달.
모두 날 위해 준비된 소품 같더라. 처음으로 온전히 숨 쉰 것 같아.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가장 크게 깨달은 건, 자신과 대화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는 거야. 자신과 친구가 되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알게 되었다는 거야.
살면서 많은 배신을 겪고 힘들었잖아. 이제 누구도 믿지 않겠다 다짐했잖아. 그런데 봐, 영원히 배신하지 않을 친구 '나'를 발견했어. 전처럼 열등감을 피하려 했다면, 강릉에 오지 않았다면, 나에게 손 내밀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거야.

물론 틈틈이 밀려오는 아무개 생각에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걸 통해 스스로를 더 깊이 들여다본 것 같아. 여행의 과정엔 힘듦도 결국 좋았던 추억이 되니까.

너의 다음 여행지는 어디일까? 그곳에선 또 어떤 걸 얻게 될까?
어쩌면 계속될 여행에도 열등감이 극복되지 않았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 도전하고 있을 너에게 박수를 보내. 도전이라는 과정, 그 속에서 얻을 선물을 맛보게 해 줘서 고마워.
분명 두려웠을 테지만 용기 내줘서 고마워.

노을아, 오랜만에 이 말을 하고 싶어. 진심으로 너를 사랑한다고.
지금 네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뭘 하고 있든 무조건 너의 편에 서서 응원할게. 너의 모든 감정과 생각을 존중할게.
누구보다 네가 아파하지 않길 바라는 사람.
지금의 나 또한 '과거의 나'가 되어 곁을 지킬게.

언제나 너의 앞날이 궁금해.
그러니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 줘.
노을아, 정말 사랑해.

From. 너의 친구
2022.09.10.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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