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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May 30. 2024

'돌아가셨다'는 말의 의미

[잡담술집] 7화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고 나무 와인잔의 베이스를 만졌다.

도자기 그릇을 모두 닦아낸 젝스는 수납장 아래 서랍에 린넨을 접어 넣었다. 새로운 행주를 꺼내 따뜻한 물로 적시고 구석 석반에 꽂혀있던 LP판 커버를 쓸었다.  


젝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술도 마시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30분째 어떠한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시선은 와인잔의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젝스는 그녀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혹시 고민이 있으신 건가요? 사색을 방해했다면 죄송해요."

한 번의 숨을 보내고 그녀는 대답했다.

"요즘 들어 인생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 어려운 주제네요."


그녀는 젝스를 쳐다보며 가볍게 웃었다.

"너무 심오하죠?"

"어려운 주제인 만큼 대화에 좋은 소재도 없죠."

젝스는 LP판을 내려놓고 구석에 있던 위스키 병을 꺼내 플라스틱 잔에 따랐다.

"물 잔인 줄 알았는데 술잔이었네요."

"같이 취해야 재밌잖아요. 특히 인생에 관한 얘기를 할 때는요."

"하하, 좋네요."

젝스와 그녀는 잔을 가볍게 부딪히고 한 모금 들이마셨다.


편백나무의 마지막 향을 마신 그녀는 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런 벌써 다 마셨네요. 혹시 지금 드시고 계신 술로 주문 가능할까요?"

"그럼요. 이건 서비스로 드릴게요."

젝스는 수납장으로 몸을 돌렸다.

"저도 플라스틱 잔에 주시겠어요? 서비스잖아요."

"말 그대로 '공짜'가 아닌 '서비스'를 드리는 거예요.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마침 고객님에게 딱 맞는 잔이 생각났거든요."

"그렇다면 감사히 받을게요."


젝스는 나비모양의 홈이 파인 크리스털 잔을 꺼냈다. 그 위로 위스키를 따르자 크리스털 잔은 위스키와 함께 식탁등의 주황빛을 머금어 은은한 노란빛을 뿜어냈다. 마치 작은 유리 스탠드 같았다. 젝스는 긴 집게로 잔에 허브를 넣고 크게 한번 저었다.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제가 즐겨 마시는 술이랍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그녀의 입술에 크리스털 잔이 닿자 바닐라 향에 숨어있던 허브 향이 코 끝을 스쳤다. 그녀는 그대로 한 모금 들이켰다.

"허브와 섞이니 원래 제가 알고 있던 맛과는 완전히 달라요. 신기하네요."

"술의 성질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어떤 것을 추가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면이 발견되죠. 지금까지 술을 놓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예요. 다음엔 말린 사과를 넣어볼까 해요."

"그것도 맛있겠네요."


그녀는 한 모금 더 적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크리스털 잔은 은은한 노란빛을 뿜어 내고 있었다. 잔 아래로 스위치가 있다면 노란 조명을 끌 수 있을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젝스는 허브를 담은 유리통을 자신보다 10센티는 더 커 보이는 냉장고에 넣었다. 언뜻 보이는 냉장고의 내부는 크고 작은 반창통과 알 수 없는 재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재료들은 모두 깨끗하게 관리된 채 이름표와 재조일자가 적혀있었다. 깔끔한 젝스의 성격과 더불어 재료들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젝스는 냉장고 문을 닫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인생이라,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그녀는 다시 크리스털 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냥 왜 사는지 모르겠어서요. 우울하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갑자기 삶에 대한 의문이 들었어요."

젝스는 내려놓았던 LP판을 다시 들고 젖은 행주로 쓸었다. 하늘색 배경의 LP판 커버에는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정장 입은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어떤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저도 가끔 인생의 목적에 대해 회의감이 들곤 하거든요."

그녀는 검지손가락으로 볼을 두 번 두드렸다.

"그렇죠. 그래서 전 인생의 목적을 알아보기 전에 원초적으로 '인생'이란 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젝스는 LP판을 내려놓고 간이 의자를 꺼내 걸터앉았다.

그녀는 가만히 생각하다 무릎 위로 손을 내려놓으며 젝스에게 물었다.

"인생을 뭐라고 생각하나요?"

젝스는 고개를 들어 눈을 감았다.

"여행이요."

"이유가 있나요?"

그녀는 전에 읽었던 [우울]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브라운도 [우울]이란 책의 저자와 같은 생각이었기에 그 책을 구매한 건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은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어요. 형편이 좋지 않은 만큼 부모님께서는 자주 다투셨고 어머니께서 저희를 데리고 집을 나왔을 때가 종종 있었죠. 그럴 때마다 갈 데 없는 저희를 받아주셨던 분이 이모였어요. 툭하면 찾아오는 저희 때문에 성가실 법도 한데 언제나 웃는 얼굴로 환영해 주셨죠.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이모와 연락이 끊기긴 했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늘 가지며 살았어요."


젝스는 비교적 긴 시간 동안 머금은 술을 삼키지 않은 채 입 안에 가두었다. 잇몸이 모두 알코올에 젖어 뜨거워졌을 때 위스키를 삼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다 제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에 이모가 돌아가셨어요. 살면서 처음으로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보게 된 거였어요."

"그랬군요."

허공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젝스의 홍채는 스탠드 빛에도 여전히 수축되어 있었다.


"이모가 돌아가신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형들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인생은 뭘까'에 관한 것들이었죠. 죽음의 허무함을 알게 된 저희는 처음으로 인생의 근본적인 의미를 생각해 봤어요."

그녀는 테이블 위로 팔을 기대 체중을 실었다. 젝스의 시선은 여전했다.

"그런데 인생에 관한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저희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무의미해지니, 그동안 저희가 추구해 왔던 목표의 방향을 잃은 것만 같았죠. 결국 대화의 끝은 삶의 허무함과 죽음의 무서움을 깨닫는 정도였어요. "


그때 젝스의 눈에 초점이 잡혔다. 이야기의 분위기가 전환되는 듯했다.

"그렇게 저희의 대화가 정적으로 끝나려 할 때,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큰 형이 말했어요. '사람이 죽을 때 우리는 '돌아가셨다'라고 한다. 이 말은 즉, 원래 살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서 가셨다'라는 의미는 아닐까.' 라고요. 저는 형의 말을 듣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모두 고향이 있고 지금은 그저 지구라는 행성으로 여행 온 거구나. 나도 때가 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겠구나. 그리고 고향에서 그리웠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겠구나."


젝스는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로 인생을 여행이라 정의하게 되었어요. 어쩌면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그냥 그렇게 믿기로 결심 한 걸 수도 있어요."

"'돌아가셨다'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이미 인생을 여행이라고 정의했던 걸까요?"

"그런 걸 지도 모르죠."

젝스의 잔은 어느샌가 가벼워져 있었다. 그녀는 젝스에게 초콜릿을 건네며 말했다.

"안주도 먹어줘야 해요. 그래야 다음 잔을 마실 수 있잖아요."

젝스는 건네받은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초콜릿 안의 부드러운 캐러멜 시럽은 위스키가 지나간 뜨거운 흔적을 감싸주었다. 이모에 대한 기억도 다시 잠잠해지는 듯했다.


그녀는 선반에 꽂혀있는 [우울]이라는 책을 가리켰다.

"저도 브라운처럼, 그리고 이 책의 저자처럼 인생을 여행이라 생각해 보려 했어요."

"읽어 보셨군요."

"좀 전에요."

그녀는 빈 초콜릿 봉지를 만지작 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을 여행이라 생각하려 해도, 어쩔 수 없는 세속적인 욕망을 포기하는 건 어렵더라고요. 저자처럼 인생을 조금은 가볍게 생각하고 싶은데 말이에요."

"여행을 하면서도 욕심은 생길 수 있으니까요. 그저 여행 가방 안에 무엇을 담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 제 가방에는 무엇을 담아야 할지 고민되네요."


젝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빈 가방이어도 좋겠죠. 어차피 나중에는 다 벗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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