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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03. 2024

나는 지금 살아있구나

[잡담술집] 9화

그는 그녀가 준 건포도 비스킷을 스탠드에 비춰보았다. 부스러기가 많이 떨어질 것 같은 과자는 다행히도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였다.

과자를 물고 위스키로 입을 적시자 비스킷의 담백함과 건포도의 새콤함이 더 도드라졌다.


그는 입가에 은 부스러기를 엄지로 쓸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채 턱을 괴고 있는 그녀는 세상의 모든 여유로움을 안고 있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녀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처럼 턱을 괴고 고개를 실었다. 눈을 감고 몸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자 평소에는 듣지 못했던 무언가가 그의 귓가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

카트리지 바늘이 먼지를 긁는 소리


그는 솜털을 옆으로 젖혀 차례대로 찾아오는 손님을 천천히 맞이했다.


테이블 어딘가로부터 들려오는 남녀의 애교 섞인 목소리

그녀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려놓는 소리


그렇게 마지막 손님을 맞이하려 할 때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투터운 옷을 여러 겹 싸맨 채 방문한 손님은 가만히 문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조금의 시간을 더 빌려 옷을 하나씩 벗겨 보았다. 한 장, 두 장, 천천히 손님의 옷을 벗겨냈다.


마침내 알몸을 들어낸 손님은 다름 아닌 자신의 숨소리였다. 살면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나른하고 안정적인 자신의 호흡이었다. 그에게 찾아온 호흡의 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손님에게 집중하자 다른 모든 소리는 물방울에 맺힌 사물처럼 흐려졌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숨소리를 들었다.

'쿵, 쿵, 쿵'

그의 심장은 규칙적인 텀을 두고 열심히 뛰고 있었다. 신체에 피를 전해주기 위해, 다시 일어설 힘을 주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기특하게도 심장은 계속 뛰고 있었다.


'나는 지금 살아있구나'


세상 어딘가의 암흑 속에 홀로 앉아 숨 쉬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 그는 고요하고 차분한 공기의 토닥임을 느꼈다.

'이를 느끼기 위해 그녀는 눈을 감은거구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 까, 그가 한참 소리에 집중하고 있을 때 새로운 손님이 그의 귓가를 두드렸다.

'다다닥, 다닥.'

젝스의 분주한 발소리였다.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 동시에 일어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웃음이 끊길 때쯤 그는 잔을 들고 말했다.

"같이 마실래요?"

그녀는 그를 따라 잔을 들고 대답했다.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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