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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May 31. 2024

삶은 죽어서도 계속된다

[잡담술집] 8화

누군가의 호출을 받고 자리를 떠난 젝스의 뒤로 그녀는 홀로 앉아 잔을 바라보았다. 크리스털 잔의 노란 조명은 여전히 자신의 우아함을 뽐내고 있었다.

"정말 인생이 여행이라면 신은 왜 인간에게 여행을 다녀오게 한 걸까."

그때 그녀의 뒤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필요한 여정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품 안에 가둬놓고 싶은 자식을 보낼 정도면 엄청난 가치가 담겨 있나 보죠."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크리스털 잔을 놓칠 뻔했지만, 위스키만 조금 흘렸을 뿐 변상은 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취기가 많이 돌아버린 젊은 여자가 비틀대고 있었다. 무리에서 젊은 여자를 향해 손을 흔드는 걸로 보니 그들의 일행인 듯했다.


젊은 여자는 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인생이 정말 여행이라면, 삶은 죽어서도 계속된다고 볼 수 있겠네요. 여행이 끝났을 뿐 진짜로 죽은 게 아니니까요."

젊은 여자는 치마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작은 과자를 건넸다. '건포도 비스킷'이라고 적혀 있었다. 힘을 주고 쥐었는지 조금 비틀 있었다.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과자인데-"


그때 어느샌가 다가온 젊은 여자의 일행이 끼어들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친구가 많이 취했네요."

체격 좋은 남자는 젊은 여자를 부축하면서도 그녀의 상태를 계속 확인했다.

"혹시 이 친구가 실수하지는 않았나요?"

"전혀요."

그녀에게 말을 건네면서도 젊은 여자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눈빛은 다정하면서도 성적인 욕망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는 그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로 흘 위스키를 휴지로 닦았다. 나무 테이블 결 사이로 흡수된 위스키는 특유의 달콤한 향을 뿜어댔다. 그녀는 냅킨으로 향을 빨아들이고 혹여 브라운이 보진 않았을까, 하고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도 젝스는 단체손님에게 많은 주문을 받았는지 이쪽을 쳐다볼 여유 없어 보였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벽면의 창가를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투 자크를 끝까지 잠근 채 얼굴을 파묻고 걸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바람이 찬 모양이었다.

겨울밤이니 그럴 수밖에, 하며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었던 코트를 들었다. 찬 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태우는 것이 그녀의 소소한 행복이었기에 코가 시큰한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금방 다녀와야겠다."




그녀가 느릅나무에 몸을 기대 나무는 그녀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주었다.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고 한숨 크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숨에 따라 담배 끝은 시멘트 색으로 타들어 갔다.

그녀가 탄 숨을 다시 내뱉으려 할 때 그가 가게 문을 열었다. 동시에 담배 연기가 그의 얼굴을 덮쳤다.

"이런, 죄송해요."

그는 가볍게 손을 저으며 웃었다.

"괜찮아요. 마침 바람이 그렇게 불었을 뿐인요."


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그녀를 지나 가게 옆 편의점에 들어갔다. 편의점의 빨간 간판에는 초록색으로 크게 '24H'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바람에 덴 손을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고 느릅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휴, 담배도 이제 끊어야겠어. 이게 무슨 민폐야."

그녀는 마침 다 떨어진 담뱃갑을 구겨 휴지통 던졌다.




가게로 들어온 그녀의 볼은 상기되어 있었다. 젝스는 그녀에게 담요를 건네주었다. 검은색이 섞인 붉은 계열의 담요였다.

그녀는 담요를 받으며 젝스에게 물었다.

"고마워요. 바쁜 건 해결되었나요?"

젝스는 눈물 닦는 시늉을 하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저기요~"

쉴 새 없이 또다시 누군가 젝스를 불렀다.

"아무래도 오늘 제 인기가 많은 모양이에요. 그럼 마저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젝스가 자리를 옮기고 그녀는 건네받은 담요로 무릎을 덮었다.


그녀는 젊은 여자에게 받은 과자를 뜯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하게 구워진 비스킷은 페스츄리 도우에 건포도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녀는 남은 과자를 마저 털어 넣고 텁텁해진 입을 적시려 잔을 들었다. 그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인사를 하고 그녀를 지나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건포도 비스킷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기분 안 좋으셨죠."

그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는 바스락 거리며 건포도 비스킷을 건넸다.

"이거 드실래요? 저도 받은 건데 맛이 괜찮더라고요."

그도 검은색 봉투를 흔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도 뭐 좀 드릴게요. 방금 안주거리를 사 와서요."

 아몬드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아몬드만큼 최고의 안주도 없죠. 다음날 속도 괜찮고요."

"감사히 먹을게요. 물물교환 같네요."


그녀는 다시 크리스털 조명이 켜져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가 준 아몬드는 소금으로 간이 되어 있어 담백하면서 짭조름했다.

다섯 번째 아몬드를 집었을 때 그녀의 손가락에 붙은 소금 결정들은 주황빛에 반사되어 노을 아래 모래알처럼 반짝거렸다. 그녀 모래알을 혀로 핥아내었다.


위스키로 입을 구고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그녀의 몸으로 서서히 퍼져가는 술기운은 담요의 체온이 미처 닿지 못한 남은 구석을 데워주었다.

"기분 좋다."

떠도는 먼지를 조심스럽게 울리는 노래도, 적당한 취기가 퍼져 몽롱해진 그녀의 마음도, 가게와 함께 책들 위로 켭켭이 쌓였을 그동안의 시간도 모두 그녀의 속눈썹 위로 내려 눈을 감게 만들었다. 더없이 포근한 순간이었다. 눈을 감고 있자니 아무도 없는 암흑 속에 홀로 앉아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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