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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04. 2024

답을 찾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잡담술집] 10화

그는 그녀 옆 앉으며 아몬드 봉지를 가리켰다.

"입맛에 맞았나 봐요."

그녀는 아몬드를 집으며 말했다.

"말씀하셨던 대로 최고의 안주더라고요."

"다행이네요. 소금이 묻어 성가시긴 하지만요. 다음에는 소금 없는 걸로 드릴게요."


반들거리는 그녀의 손가락을 보며 그는 냅킨을 건넸다. 정사각형의 갈색 냅킨은 앞면과 뒷면이 다른 재질이었다. 거친 재질의 앞면은 손이나 먼지를 닦기에 좋았고, 부드러운 뒷면은 입술을 쓸기에 좋았다. 그녀는 앞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이곳엔 처음 와봤는데 좋은 것 같아요. 뭐랄까, 아늑하고 포근해요."


그는 젝스의 플라스틱 잔을 가리키며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여기 주인장, 술 마시면서 일하는  아나요?"

"하하, 제 앞에서도 드신걸요."

그는 아몬드를 입에 넣었다. 유독 타기 직전까지 구워진 아몬드는 고소한 향을 풍기며 으스러졌다.  

"제가 올 때마다 늘 마시고 있다니까요. 정도 이상으로 마셔버리니 젝스의 건강이 걱정돼요."

"브라운의 본명이 젝스군요."


그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차, 저도 모르게 말해버렸네요.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 했는데, 브라운이라는 이름은 좀처럼 어색해서요."

"젝스와 가까운 사이인가 봐요."

그는 테이블 너머 작은 액자를 가리켰다. 진갈색 나무 액자에는 그와 젝스가 어깨동무를 한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젖살이 가득한 그들의 모습은 앳돼 보였다.

"벌써 10년도 더 됐어요. 스페인 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났죠. 그 인연이 이렇게 오래갈 진 몰랐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젝스는 변함없네요."


젝스를 바라보는 그를 따라 그녀도 고개를 돌렸다. 우연히 마주친 젝스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젝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재능이 많았나요?"

"오, 벌써 알아보셨네요."

"가게에 닿은 젝스의 손길만 봐도 알 수 있죠. 술만 잘 만든다고 이런 포근한 분위기가 연출되진 않으니까요."

그는 잔을 들며 말했다.

"맞아요. 젝스는 예전부터 재주많아 뭐든 배우면 곧잘 해내곤 했어요."

"부러운 재능이네요."

"그런데 젝스는 자신의 그런 면을 썩 좋아하진 않았어요. '너는 참 다재다능한 것 같다'라고 말하면 젝스는 늘 이렇게 말했거든요."


그는 나지도 않은 턱수염을 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젝스를 흉내 내는 듯했다.

"난 모든 면을 어중간하게 잘하는 것뿐이야."

그녀는 젝스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듯해 웃음이 났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꽤 괜찮았나요?"

새어버린 눈물을 닦으며 그녀는 말했다.

"순간 젝스로 빙의된 줄 알았잖아요."


그는 자세를 고치고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켜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저는 칭찬한답시고 말한 건데 젝스의 대답을 들으니 당황스러웠어요. 조금은 교만해 보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젝스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알겠더라고요. 아마 젝스는 예고편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하나에 집중시킬 수 있는 본편을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어깨를 들어 올리며 그는 웃음 섞인 어투로 말을 이었다.   

"재능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진로를 결정하는데 골치 아파지기도 하나 봐요. 결국 젝스는 혼자 스페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딱 열흘 만에 저희에게 돌아와 이렇게 말했어요. '일재일능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고요.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더니 그냥 하고 싶은 걸 찾았다는 뜻이었어요."

"열흘동안 젝스에게 엄청난 일이 있었던 모양이죠?"


어느새 납작해진 아몬드 봉지는 축 늘어진 여름용 이불처럼 테이블을 가볍게 덮고 있었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외투 주머니를 뒤적여 새로운 아몬드 봉지를 꺼냈다.

"사실, 젝스는 열흘동안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꿈을 찾을 수 없었대요. 자신이 뭘 원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고 했어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숙소로 돌아갔다고요."

"그렇지만 하고 싶은 걸 찾았다고 했잖아요?"

"그랬죠. 실망이 가득했던 열흘째 밤에 산책하던 중 우연 들어간 술집에서 찾았대요. 그곳이 젝스의 무언가를 울렸던 모양이에요. 나이 때문에 술을 마시진 못했지만 분위기가 마음을 강하게 끌어냈다고 했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양손으로 감 쌓다.

"우연히 들어가게 된 술집이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답을 얻게 된 거군요."

그도 그녀를 따라 오른손으로 잔을 감 쌓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로의 행동을 옮기고 있었다.

"별거 아닌 동기가 지금의 열정적인 젝스를 만들어 놓은 거죠."

"그러게요. 뭐든 깊이 고민할 게 없네요. 젝스처럼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요."


그녀는 젝스를 바라보았다. 2인석 테이블에 앉은 두 명의 남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도 그녀를 따라 젝스를 바라보았다.

"바쁜 삶 속에서 잠시나마 숨 돌릴 수 있는 아늑한 장소를 만들고 싶다고 했어요. 정확히는 숲 속의 작은 나무 의자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말했죠. 브라운이라는 예명도 나무의 색을 따서 지은 것 같아요."

젝스는 땀 흘리는 와중에도 어딘가 신나 보였다. 그녀는 그런 젝스를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도 언젠가 알 수 있겠지. 내가 뭘 원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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