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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06. 2024

성숙하다는 건 아파봤다는 증거

[잡담술집] 12화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아몬드를 그에게 건네며 그녀는 물었다.

"피드윌은 요즘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그에게로 넘어간 아몬드는 상대에게 바통을 넘긴 것처럼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그녀는 마이크라도 건넨 것 같은 자신의 모습에 순간 웃음이 났지만 나무 벽의 나이테를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들키진 않았다.


"성숙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자세히 들어봐도 되나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옆면을 바라보았다. 목젖이 한번 꿀렁거렸다. 꽤나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예감에 그녀는 입가의 웃음을 지웠다.

"사람들은 살면서 많은 성장을 하게 되고 그걸 토대로 성숙해지잖아요. 그런데 문뜩 성숙해진다는 게 조금 슬프다는 생각을 했어요."


잠시 멎 그의 목젖을 보며 그녀는 울멍진 사각형이 다시 꿀렁거리기를 기다렸다.

"저는 스무 살 때 작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일하는 기간이 오래될수록 사장님과 친해지면서 둘이 종종 술을 마시곤 했. 그날도 어느 때와 같이 술을 마는데 사장님께서 저에게 그러시더라고요. '피드윌은 참 어른스러운 것 같아. 물론 나는 너의 그런 면도 좋지만, 조금은 피드윌 나이에 맞는 어리광도 부리고 실수도 했으면 좋겠어'라고요."

그녀는 유리잔을 만지작 거리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그동안 성숙하다는 말을 종종 들었을 텐데도 가장 가까웠던 어른에게 들으니 제가 정말 성숙하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었어요."


그는 건조해진 볼이 가려웠는지 손톱으로 두어 번 긁적였다. 그녀는 뒷주머니에 있던 로션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저도 살이 잘 터서 들고 다녀요. 성분이 세지 않아서 괜찮을 거예요."

"고마워요."

그는 손바닥에 로션을 짜서 볼에 문질렀다. 정말 성분이 약한 탓인지 아무런 향이 나지 않았다.

"이제 좀 낫네요."

그녀는 테이블 위로 로션을 올려두며 말했다.

"여기 둘 테니까 필요할 때 써요."

그는 촉촉해진 볼을 만지며 말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마저 말해줘요."


한동안 벌어져있었을 뒷주머니를 손으로 누르며 그녀는 엉덩이를 앞으로 당겼다. 그는 볼을 쓸었던 손을 그대로 내려 턱을 받쳤다.

"하지 않은 성숙. 저는 성숙해져 버린 바람에 나이에 맞는 실수나 어리광을 부리지 못하게 됐어요."

그녀는 잔을 바라보았다. 미동 없는 위스키는 가쪽에서부터 녹아 흘러지는 얼음을 자신의 몸으로 덮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실수가 있긴 하죠. '실수하지 않는 것이 실수다'라는 말처럼 실수는 중요한 과정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피드윌, 나이에 맞는 실수는 하지 못했더라도 덕분에 또래들이 보지 못한 무언가를 피드윌은 느끼고 포용할 수 있었던 거 아닌가요?"

"저도 그좋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너무 어린나이 성숙해져 버렸다는 게 슬퍼요. 성숙해지기 위한 전제조건은 반드시 어떠한 일을 겪어야 해요. 즉, 아파봐야 하잖아요."


그는 다시 나무 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성숙해져가고 있어요. 성숙할수록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수하지 않게 되지만 동시에 성숙해질수록 순정을 잃어버리게 되잖아요. '성숙한 사람'이라는 건 '더 이상 아프기 싫어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어른'이기도 하니까요. 아직은 어린아이처럼 다치더라도 계산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에요. 양날의 검이네요."


그는 그녀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제 말에 두서가 없었죠? 생각에 꼬리를 무니 성숙하다는 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어요. 성숙해진 본인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지, 안타깝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피드윌, 말 그대로 양날의 검이에요. 반대되는 두 개의 양날이 있어야 단단한 검이 될 수 있죠."


그녀는 비어있는 아몬드 봉지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계산적으로 행동한다는 건 피드윌이 말한 것처럼 아프기 싫어서 하는 행동이죠.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어요.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고통을 주고 싶지 않은 거죠. 타인보다도 자신이 더 귀하고 소중해졌기 때문에 남에게 계산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거예요."


조금의 바람에도 날아갈 듯한 아몬드 봉지 위로 먼지 몇 톨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계산적이다'를 무작정 부정적으로 볼 수도 없는 게, 타인에게 선을 긋는 동시에 예의를 갖추게 되고 서로를 각자의 인격채로 존중하게 되잖아요."


위로 얹은 먼지들로 하여금 나름 무거워진 아몬드 봉지는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채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아파서 성숙해졌다는 건,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는 건, 슬프긴 하지만 지혜가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먼저 아파본 어른들이 아직 아픔을 모르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그것이 어른의 몫 아닐까요? 어쩌면 세상은 그렇게 순환되는 걸지도 몰라요. 피드윌이 그런 좋은 어른이 된다면, 분명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될 거예요."

"그런 거군요."


그녀는 눈을 얇게 뜨고 장난기 섞인 어투로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피드윌은 아직 어려요. 본인을 성숙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어린걸요?"

그는 그녀의 장난을 받아치기 위해 검지로 코 밑을 막고 얇은 소리를 냈다.

"제가 먼저 스스로를 성숙하다고 말한 적은 없답니다."

그들은 씰룩거리는 서로의 입가를 보며 동시에 웃었다.

웃음이 꺼져갈 때쯤 그녀는 아몬드 봉지를 쪽지 모양으로 접어 그에게 건넸다.

"시간이 지나도 어른스럽다는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다면, 제가 피드윌은 어리다고 소문내고 다닐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요."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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