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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07. 2024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 말문이 트는 비밀장소

[잡담술집] 13화

그가 잔을 들었을 때 아래로 뻗어지는 조명은 검은색 잔 안으로 굴절 없이 떨어졌다. 그녀는 그의 잔을 바라보았다. 분명 검은색 잔이었지만, 위에서 보니 맑은 투명색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그의 잔이 비고, 자신이 고개를 숙이고 나서야 진짜 잔의 색을 알게 된 것이었다.  

"아, 잔이 비었군요."

그는 잔을 들고일어났다.

"대화라는 안주가 참 맛있었던 모양이에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말을 끝으로 그는 주인 없는 작업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젝스가 바쁠 때면 제가 직접 따라 마시거든요. 물론 돈은 계산해 두고 있어요."

그는 수납장 맨 위쪽에 비치되어 있는 돌잔을 꺼냈다. 제법 무게감이 느껴지는 돌잔은 다소 거친 감이 있었지만 니스가 가볍게 칠해져 표면은 매끈했다. 아버지의 턱살을 생각나게 했던 돌그릇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제가 스무 살 때 헝가리에서 사 온 거예요. 젝스가 좋아할 것 같아서 골라봤죠. 수납장 맨 위 칸에 있는 걸 보니, 다행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에요."

"헝가리라, 젝스와는 스페인에서 만났다 했었죠. 피드윌은 여행을 좋아하나 봐요?"

그는 잔을 내려두고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술을 살폈다. 위스키는 첫 번째 칸에, 보드카는 두 번째 칸에, 그 밖의 나머지는 세 번째 칸에 진열되어 있었다.

"좋아하죠. 특히 혼자 가는 여행을 좋아해요. 아버지께서 언젠가 말씀하셨어요. '관광을 하려면 같이 가고, 여행을 하려면 혼자 가라'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구경이 아닌, 녹아내리는 것. 그런 여행을 좋아하는 거군요."

그녀는 손바닥을 맞닿아 부딪히며 말했다.

"오, 인생을 여행이라 정의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 더 생겼어요. 인생과 여행. 두 개 다 혼자 하는 거예요."

"그렇네요. 나중에 젝스에게 말해줘요. 분명 좋아할 거예요."

마음에 드는 위스키를 고른 그는 수납장을 닫고 그새 뻗뻗해진 허리를 손으로 짚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피드윌, 아무래도 운동 좀 해야겠어요."

"그러게요. 관리 안 하면 정말 골병 나겠어요."


그는 위스키 뚜껑을 따고 돌잔 위로 천천히 부었다. 젝스만큼이나 좋은 손기술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차분해지는 부드러운 손동작이었다.

그는 위스키를 제자리에 두고 수납장 옆에 위치한 연갈색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과자가 들어있었다. 그는 구석에 있던 과자를 꺼내며 말했다.

"이건 제가 젝스에게 줬던 거니까, 그냥 먹어도 되겠죠?"

"저는 모르는 거예요."

"하하, 그럼요."

그는 과자를 그릇에 덜고 자리로 앉았다. 돌잔을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마셔볼래요?"

"좋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받았다. 무겁다는 표현보다는 묵직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잔이었다.

주둥이 부분이 두툼하면서도 매끄럽게 처리되어 있는 돌잔은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적셨다. 마치 두툼한 입술과 키스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조금의 시간을 빌려 위스키를 입안에 가두었다.

향이 깊고 진한 위스키였다. 그녀는 다시 잔을 건네며 말했다.

"상큼한 위스키네요. 돌잔에 마시니 마치 절구로 빠은 과일을 먹는 기분이었어요."

"다행이네요. 그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그는 그녀의 입술에 닿았을 돌잔의 주둥이 부분을 아랫입술로 받히고 그 위로 넘어오는 술을 마셨다. 차가운 돌잔은 부분적으로 그녀의 체온으로 데워져 있었다.

녀는 스쳐 지나간 돌잔의 감촉을 기억하려 입술을 쓸었다.

"이렇게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돌잔은 나무테이블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윤이 도는 잔의 주둥이를 보며 말했다.

"늦은 밤,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으면 자신의 모든 걸 말하게 되는 마법에 걸린다고 하죠. 지금이 딱 그런 상황 같아요."

"저희에게 그 비밀의 장소여기네요."


그때 그들의 뒤쪽에서 커플 한쌍의 대화가 들려왔다.

"벌써 50일이라니, 자기랑 있으니까 시간이 너무 빨리 가."

"그러니까. 우리 이렇게 50년, 100년 쭉 함께 하자."

그는 뒤돌아 보 않았지만 그들은 분명 나란히 앉아 서로의 공기를 아주 가까이서 들이마시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초콜릿 과자를 베어 물며 중얼거렸다.

"사랑이라"


작지만 확실하게 들린 그의 혼잣말에 그녀는 물었다.

"저들의 대화가 피드윌에게도 들렸나 봐요?"

"어쩌다 보니 듣게 되었네요. 흘려듣는 것만 해도 귀에서 꿀이 떨어질 것 같아요."

"뭐, 다들 저때가 있으니까요. 사랑만큼이나 흥미로운 주제도 없죠."

그는 돌잔 주둥이에 묻은 위스키를 엄지로 닦으며 말했다.

"제가 연애했을 때도 생각나고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언 듯 뒤로 보이는 커플의 모습에 고개를 마저 돌릴 뻔했지만 그들의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으려 애써 무시했다.


"괜찮다면 피드윌은 어떤 연애를 했는지 들려줄 수 있나요?"

"저희가 나누는 대화 중 가장 긴 시간이 소요될 것 같은데요."

그녀는 그에게로 몸을 틀며 말했다.

"제가 아까 말했잖아요. 사랑만큼 흥미로운 주제도 없다고요. 여기는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 말문이 트이는 장소예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어요."

그는 손을 저으며 웃었다.

"하하, 알겠어요. 그럼 첫 연애부터 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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