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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10. 2024

연애의 완성은 이별이었다

[잡담술집] 14화

엄지에 묻었던 위스키는 지문 위로 모두 흡수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두 번의 연애를 했어요. 첫 번째 연애는 스무 살 때 만난 2살 연상과 한 거였죠.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그 사람이 더 궁금해지고 보고 싶었어요. 살면서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랑, 그녀와 함께라면 지하주차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더라도 마냥 즐거웠을 거예요."


그는 돌잔에 갇힌 위스키를 바라보았다. 위스키는 진동 없이 잠잠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저희는 서툴렀어요. 처음 접해보는 감각에 매일 새로운 흥분감을 느끼면서도, 처음 접해보는 질투 저희에게 혼란을 줬어요."

분명 잔을 바라보고 있을 그의 시선 초점이 없어 보였다. 고요한 물 위로 돌을 던지면 그의 눈에 생기가 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렇게 자주 다투면서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고, 언젠가 제가 그녀에게 심한 말을 하고야 말았죠."

그녀는 과거 자신의 연애를 그려 보았다. 자신도 그와 같았다. 가장 사랑던 사람에게 가장 큰 실수를 했었다.

그녀는 아래로 꺼져있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열정만 가득한 신입은 언젠가 사고를 터뜨리기 마련이니까요. 저도 그랬었고요."

"그래도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는 잔을 흔들어 호수에 작은 파도를 만들었다.

"너와 연애를 하는 동안 한 순간도 진심으로 행복한 적이 없었다."

그는 테이블 위로 원을 더 크게 그리며 잔을 흔들었다. 파도가 호수를 덮고 다시 호수가 파도로 변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질린다고 말했어요. 분명 진심이 아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녀에게 큰 상처를 주고 싶었어요.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알기에 누구보다도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죠."


그는 잔에 손을 떼며 말했다. 파도는 이내 호수가 되어 다시 잔잔해졌다.

"지금도 그녀가 제 앞에서 흘던 눈물이 선명하게 떠올라요. 평소였다면 분명 큰 소리로 꾸짖었겠지만 그날은 무엇하나 말하지 않고 계속 울기만 했어요."

그는 마른 코를 닦았다.

"그렇게 그녀에게 차였어요."

그는 고개를 들어 나무 벽을 바라보았다. 과거 자신의 모습을 기억으로 그리는 듯했다.

"제가 한 실수가 얼마나 큰지 알기에 그녀를 잡을 수 없었어요. 매일 밤 떠오르는 달을 보며 혼자 우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성이었어요."

"힘들었겠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녀와의 이별은 저에게 많은 걸 알려줬어요. 나의 표현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그녀는 자신의 방식대로 표현을 한 거였구나, 그러니 오해하지 말고 그저 서로를 사랑하면 되는 거였구나, 하고요."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의 눈 아래로 속눈썹 그림자가 길게 내려져 있었다. 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면 아래로 진 속눈썹 그림자가 부채질하듯 움직였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잔을 들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알게 되었어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뭔데요?"

잔을 내려놓으며 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마주한 거요."

그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헤어지고 나서 한동안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어요. 모두가 이별은 힘들다고 하지만 저는 정도 이상이었어요. 그래서 궁금했. 왜 이렇게 힘든 건지. 단순히 그녀와 헤어져서?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는 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따뜻한 차를 마시듯 시간을 두고 조금씩 베어 물었다.


"렇게 침대에 누워 달을 바라봤어요. 옆에 반짝이는 별들과 흘러가는 구름도 보였죠. 아름다웠어요."

그녀의 머릿속으로 그가 홀로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자신은 침대 밑에 기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는데 문뜩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나는 그저 달과 별과 구름만을 보고 있었구나. 정작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보지 못했었구나. 그들 못지않게 빛나고 있을 나를 보지 못했었구나."

그녀는 여전히 그가 누워 있을 침대에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제 인생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짜 놓고 빈칸을 채워줄 주인공을 찾고 있었던 거였죠. 무기력했던 이유도 영화의 주인공을 잃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동안 힘들었던 이유는 그녀와 헤어져서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녀는 왼손으로 턱을 괴고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원인을 알게 된 순간부터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어요. 어색하지만 자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 했고 스스로에게 의지하 연습했죠. 처음엔 이상했어요. 주인공이 타인에서 저로 바뀌니 손님에게 야 할 빌지를 제가 받서명하는 기분이었어요."

그는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이불을 반듯하게 접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베개를 털고 이불 옆에 가지런히 두었다.


"계속 연습했어요. 느리더라도, 잘 되지 않더라도 썼던 시나리오 모두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써 내려갔어요."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젖혀있던 창문 커튼을 닫았다. 그러고는 침대에 기대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혼자서도 시간을 흔상 하는 어른이 되었죠."

"멋지네요."


그는 멋쩍게 웃으며 초콜릿 비스킷을 집었다.

"엄청난 성장을 준 이별이었어요.  연애의 완성은 이별이었던 셈이죠."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는 연애다'라는 말이 있죠. 피드윌은 엄청난 성장을 해냈네요.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그는 앞으로 숙였던 허리를 뒤로 젖히며 자세를 바꿨다. 아무래도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는 모양이었다.

"뭐, 힘들긴 했지만 그녀와는 연애는 정말 좋았어요. 시간이 많이 지나 그저 이쁘게 포장된 기억일 수도 있지만, 저의 모든 처음을 그 사람과 공유할 수 있어 좋았거든요."

그는 피식 웃으며 과자를 입에 넣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만졌을 때,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 때, 모든 순간이 선명하게 떠올라요. 그때의 흥분감은 말로 표할 수 없을 거예요."

"첫 연애의 묘미죠. 새로운 감각의 문을 여는 순간이니까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야로 그녀의 입술에 맺힌 핏방울이 보았다. 입술 위로 칠해진 빨간색 립스틱은 피와 비슷한 색이었지만 검은색이 섞인 붉은색 덩어리는 분명 피인 듯했다.

"해론, 입술에서 피가 나요."

그녀는 검지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종종 트곤 하는데, 립밤을 챙긴다는 걸 깜빡했네요."

그는 의자에 걸쳐두었던 플리스 점퍼를 들어 안쪽 주머니를 뒤적였다.

"로션은 있지만 립밤은 챙기지 않나 봐요. 제 거라도 쓰실래요?"

그는 파란색 립밤을 그녀에게 건넸다.

"저는 로션은 없지만 립밤은 있거든요."


파란색 립밤에는 ‘For. Man’이라고 적혀 있었다.

"남성용이긴 하지만 도움 될 거예요."

"고마워요."

그녀는 립밤을 손가락에 묻혀 입술에 문질렀다. 은은한 코코 냄새가 났다. 반들거리는 그의 입술에서도 코코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립밤을 로션 옆에 두며 말했다.

"여기에 둘 테니 필요할 때마다 쓰세요."

테이블 가운데에 놓인 로션과 립밤은 그와 그녀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를 연결한 채 그들의 공간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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