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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11. 2024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게 무섭다면

[잡담술집] 15화

그녀는 잔을 물었다. 입술에 난 상처를 인식해서일까, 괜히 위스키가 벌어진 살 사이로 들어가 상처를 쑤시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연애는 어땠나요?"

"최근이라면 가장 최근이네요. 24살 때 동갑인 친구와 1년 정도 연애를 했어요. 대학교 같은 과였죠."


그녀는 아직 상처로 스며들지 않은 위스키를 냅킨 뒷면으로 닦았다. 피맛이 조금 났지만 상처가 더 벌어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구깃하게 접은 냅킨을 휴지통에 넣으며 말했다.

"모두가 말리는 캠퍼스 커플이었군요."

"하하, 맞아요. 다행히도 헤어졌을 땐 그 친구가 졸업한 상태라 마주칠 일은 없었어요."

"저도 캠퍼스 커플이었어요. 저 같은 경우엔 제가 졸업할 때까지 계속 마주쳤었죠."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지 말라고 안 할 사람이 아닌가 봐요."

"캠퍼스 연애의 재미가 있으니까요."

그는 그녀와 잔을 부딪혔다.


그는 잔을 내려두고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대학교 기숙사에 떨어지는 바람에 급히 자취를 하게 됐어요. 의도치 않은 시작이긴 했지만 나름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죠. 그런데 자취를 하고 나서부터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느껴졌어요."

그녀는 다리를 포개 앉고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친구를 만나도, 일정을 빡빡하게 잡아도 알 수 없는 외로움은 해결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무작정 좋아할 사람을 찾았죠. 사랑을 하면 공허함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의 시작이었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다.

"상대는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였어요. 처음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독백의 시간을 전부 그 친구에게 투자하면서 감정이 깊어져 갔죠."

그는 나무 벽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연애의 흔적을 지우고 두 번째 사랑을 그리는 듯했다.

"정말 행복했어요. 나만의 공간에서 그녀와 잠드는 것도, 함께 깨어나 서로의 부은 얼굴을 보는 것도 모두 가슴 벅차도록 설렜어요."


그는 나무 벽 위로 스케치한 두 번째 사랑을 지웠다. 채색은 불가능한 사랑이었을까,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외롭더라고요. 분명 그녀와 뜨거운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도 외로웠어요."

"벽이 있었군요."

"네. 그건 만남의 횟수였어요.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사람이었어요. 저희는 5분 거리에 살았지만 이주일에 한번 만났거든요. 저는 자주 보고 싶어 했고 그녀는 아니었어요."


그는 돌잔을 바라보며 주둥이를 엄지로 쓸었다.

"당시에 저는 만남의 횟수가 곧 사랑의 척도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녀의 감정을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할수록 보고 싶은 거 아니야?'제가 뱉은 한마디에 그녀는 ' 미안해, 너를 사랑하긴 하지만 내 시간이 더 중요해'라고 말했어요. 결국 그날로 저는 차였어요. 뭐, 그녀를 잡아 다시 사귀긴 했지만요. 언젠가 같은 이유로 헤어질 걸 알면서도 너무 좋아했기에 잡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녀는 마름침을 삼키며 말했다.

"시한부 연애였네요."

"맞아요. 죽는 날을 아는 시한부처럼 그로부터 300일을 끙끙 앓다 결국 헤어졌어요."

"이후로 다시 사귀지는 않았나요?"

한숨을 내쉬며 그는 말했다. 그의 목에 추라도 단 것처럼 가슴이 아래로 꺼져 있었다.

"사실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그녀에게 전화했어요. 우린 아직 헤어진 게 아니다, 더욱 끈끈해지기 위한 과정이다, 라며 스스로를 다독였고 그녀 또한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 헤어진 지 3주가 되던 날 그녀는 새로운 남자와 사귀었어요."


그는 왼손으로 돌잔을 만지며 남은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녀의 소식을 알게 된 날 저는 벤치에 누워 하늘을 봤어요. 분명 맑을 하늘이 노랗더라고요."

그는 그녀가 건넨 과자를 받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제 삶은 엉망이었어요. 저에게 했던 달콤한 속삭임이 이젠 다른 사람에게 향할 거라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어요. 그녀와의 연애는 힘들었죠. 언젠가 헤어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동시에 그녀와의 결혼생활을, 그녀와의 미래를 그렸어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모든 걸 잃게 된 저는 몸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고 이대로는 죽을 것 같아 잘만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어요. 한동안은 건강 회복에 집중해야 했으니까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후유증이 상당했네요."

"이별이 처음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이별은 적응할 수 없나 봐요."

그녀는 잔을 들며 말했다.  

"새로운 사람과의 이별이라면, 새로운 형태의 아픔이 오니까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지금은 다시 건강해진 거죠?"

그는 팔을 들어 보이며 보디빌더 자세를 취했다.

"물론 지금은 완전히 회복했답니다. 아직까지 백수인 이유는 진로 탐색 중인 거로 해두죠."

"다행이네요."


어느새 초콜릿 비스킷은 한 개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손을 뻗었다. 그때 그들의 손 끝이 닿았다. 체온이 오갈 정도의 시간은 아니었지만 살결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드세요. 마침 드리려 했어요."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도 그런 걸요."

그녀는 과자를 들어 올렸다.

"럼 반씩 나눠 먹을까요? 원래 뭐든 나눠 먹어야 더 맛있잖아요."

"하하, 좋아요."

그녀는 비스킷을 반으로 쪼개 더 큰 부위를 그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그들은 비스킷을 입에 오래 두고 천천히 씹었다.


비스킷이 녹아 없어졌을 때쯤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이번 연애는 피드윌에게 어떤 의미였나요?"

입을 헹구려 위스키를 마시는 그를 보며 그녀는 테이블 위로 돌잔이 내려지길 기다렸다.

그는 입을 닦고 그새 거칠어질 손등에 로션을 짜며 말했다.

"누군가를 아무리 사랑해도,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새로운 사람과 만난다는 그녀의 소식은 충격적이었지만, 동시에 나 또한 새로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근거가 됐으니까요."


테이블 가운데로 로션을 두며 그는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해, 이성 간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내려놓았던 추를 다시 목에 걸고 가슴을 아래로 숙였다.

"지금 당장은 서로 없인 죽을 것 같아도 언제든지 그럴 상대가 바뀔 수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그 어떠한 사랑의 속삭임도 믿지 못하겠어요. 나와의 영원을 외치던 그녀가 떠났으니, 그동안 저에게 했던 모든 언어들이 저를 배신한 것 같아요. 언젠가 떠날 속삭임이라면 애초에 시작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연애를 기피하게 된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저도 같은 이유로 연애를 망설였던 적이 있거든요."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긴 머리칼이 주황 전구의 빛을 받아 부분적으로 회색을 띠고 있었다.

 "저는 세 번의 연애를 했어요. 피드윌처럼 만남과 이별을 겪었죠. 헤어짐은 늘 적응되지 않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저를 아프게 했어요. 그들이 속삭였던 사랑의 언어도 언제나 떠나가 버려 허무했죠."

그녀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검은색 머리칼이 어깨를 타고 옆으로 넘어갔다.  

"그래도 피드윌, 언젠가 눈을 감고 생각해 보니 서로에게 속삭였던 언어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과 썼던 책에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였어요. 사랑들은 도망가지 않고 나의 시간들과 추억으로 책에 새겨진 거였죠. 그러니까 그 책은 그냥 덮어두고 새로운 책을 펼치면 돼요."


그녀는 그에게 걸려 있던 추를 빼내어 옆으로 던졌다. 그러나 분명 가벼워졌을 텐데도 그는 여전히 가슴을 아래에 두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렇지만 해론, 새로운 책을 펼쳤다가 다시 힘들어지면 어쩌죠? 그 책 또한 영원하지 않을 텐데요."

연애의 슬픔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그는 고개를 더 아래로 숙였다. 그녀는 그의 눈을 보려 얼굴을 기울였다.

"원하는 책이 있다면 무서워도 펼쳐봐야죠. 보기 전까진 그 책의 장르는 모르는 거예요. 그리고 영원히 연재될지 누가 아나요?"

"그건 그렇네요."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아직 겁이 많은 가봐요."

"사랑에 겁 없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사랑은 겁쟁이도 뛰어들게 만드니까요. 분명 피드윌이 원하는 사랑이 올 거예요."

녀는 가벼운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피드윌의 완전한 사랑이, 영원 사랑이 있다고 믿어요. 정말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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