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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12. 2024

내가 하필 그 신을 믿는 이유

[잡담술집] 16화

그는 문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몬드 좀 사 올까 하는데 같이 나갈래요?"

"좋죠."




새벽 2시, 몇 안 되는 사람들은 달 빛에 의지한 채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발이 벗겨질라 손으로 머리를 푹 누르고 뛰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취한 동료를 부축하고 택시를 부르는 남자도 보였다. 그들의 밤은 각자의 삶에서 모두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딸랑'

편의점 매장 직원은 손님이 들어온 지도 모른 채 고개를 꾸벅며 졸고 있었다. 제법 크게 딸랑이는 종소리도 그의 단잠을 좇을 순 없는 모양이었다.

"조용히 골라보죠."

계산을 할 땐 직원을 깨워야 했지만 그전까지만이라도 그의 달콤한 휴식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몬드를 먼저 담고, 젝스의 것도 하나 담았다. 그들은 비밀 요원이라도 된 것처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해론, 이건 어때요?"

그가 집은  튀긴 라면 사리 위로 설탕이 뿌려져 있는 과자였다.

"아요."


그때 50대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편의점 문을 크게 젖히고 들어다. 여전히 직원은 졸고 있었지만 중년의 남자는 직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숙취해소제 있나요?"

잠에서 깬 직원은 화들짝 놀라며 입가로 새어버린 침을 손등으로 닦았다. 직원은 간이의자에서 일어나 바코드 스캐너를 들며 말했다.

"계산해 드릴게요."

중년의 남성은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아니, 숙취해소제 있냐고요."

"손님, 죄송하지만 취나물은 없습니다."


목소리가 유독 작은 중년의 남자와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직원의 동문서답 대화는 한동안 이어졌다. 그들은 방영되는 코미디 영화를 마저 관람한 후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겨 죽는 줄 알았어요."

"정말이요. 개그 프로를 보는 것 같았어요."

 한참을 웃다, 그는 촉촉해진 눈가를 닦으며 느릅나무 옆 벤치를 가리켰다.  

"잠깐 앉았다 갈까요?"

넓게 트인 벤치는 품고 있는 추억이 많은 듯 다양한 모양의 흠집이 있었다. 그녀도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마침 바람도 불지 않네요."


그들은 나란히 앉아 높이 떠 있는 그믐달을 바라보았다. 뾰족해 보이는 달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역시 밤공기는 참 좋네요. 담배라도 우는 것처럼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 같아요."

가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한숨 크게 들이마시는 그녀를 보 그는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담배 하시는 거죠?"

그녀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금연하기로 했어요.  시작한 참이에요."

"저 때문은 아니겠죠?"

"겸사겸사라고 해 둘게요."


그들은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인공위성인지 행성인지 모를 별을 바라보며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와의 제법 가까워진 거리를 생각하며 마침 머리를 감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흘러가는 시간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내리는 팔과 함께 말을 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이 괴로웠어요. 재밌는 영화를 보는 것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산책하는 것도 제 마음은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모두 허락하지 않았었거든요."


달이 눈 부셨는지 그녀는 그의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피드윌과 앉아 바람을 누리고 있네요."

그는 그녀가 바라보았을 달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전히 뾰족해 보이는 달이었다.  

"힘든 일이 있었나요?"

공백이 길어지는 그녀의 대답에 그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실례되는 질문이었다면 죄송해요. 대답 안 하셔도 돼요."

"아니에요. 잠시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녀도 그를 따라 다시 달을 바라보았다.

"아까 했던 얘기예요. 인생에 대한 회의감."

"그렇군요."


그녀는 턱을 위로 당겨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몸을 바르게 세워 숨을 내쉬었다. 작게 보이는 가로등의 하얀 전구가 그녀의 시야로 들어왔다. 엉켜있는 전깃줄이, 조명을 좋아하는 벌레들이 가로등 빛 아래로 발각되고 있었다. 전깃줄 위로 앉은 하얀색 비둘기 한 마리는 밤새 고된 여정을 보냈는지 한참을 쉬고 있었다.

그녀는 비둘기의 휴식을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들어줄 수 있나요?"

달 빛에 그을리고 있는 그녀 옆으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충분히 쉬었는지, 하얀색 비둘기는 몸을 뒤뚱거리다 어디론가로 날아갔다. 그녀는 가로등 뒤편, 아직 꺼지지 않은 건물 조명으로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저는 사랑도 하고 있었고, 좋은 직장도 있었고, 대인관계도 원만했어요. 모든 게 문제없이 평화로웠죠. 그런데 어느 날 문뜩 사랑을 왜 해야 하는지, 직장은 왜 다녀야 하는지, 대인관계는 왜 유지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그녀의 입에선 차가웠던 공기가 데워 나오고 있었다.

"인생의 목적과 같은 원초적인 의문이네요."

"네. 물론 의문의 답은 찾지 못했어요."

그녀는 혀로 입술에 난 상처를 쓸어보았다. 피맛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상처가 그새 아문 모양이었다. 아마 그가 준 립밤 덕분이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침을 삼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엔 별생각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활기가 없어지고 우울감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모든 상황에 '왜'라는 의문을 가지며 의미를 찾으려 했죠. 의미가 없으면 그 행동을 왜 해야 하는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일도 정말 의미가 있는 건지, 나는 어떤 의미로 사는 건지, 나는 왜 사는 건지 의문의 늪은 점점 깊어져 갔어요. 모든 색이 더해지면 검은색이 되듯, 제 감정은 뒤죽박죽 섞여 누군가 밟고 간 흙탕물처럼 탁해져 갔어요."


그녀는 건물 조명과 가로등 사이로 빛는 빨간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하물며 제 신앙도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신은 정말 존재하는 걸까? 사람들이 지어낸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닐까?"

"듣는 것만으로도 복잡해지네요. 어려운 문제인 것 같은데 지금은 해결된 건가요?"

그의 손끝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있던 손난로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저는 머리가 복잡해질 때면 생각들을 글로 적곤 해요. 그날도 똑같이 공원의 작은 카페에 앉아 뒤섞인 생각들을 적고 있었어요. 창문이 넓게 트여 전망이 좋은데도 글을 쓰느라 정신없었죠. 꽤나 깊은 고민이었는지 한참을 써 내려갔어요."


그녀는 고개를 높이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짙게 깔린 파란색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 보였다.

"그때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어요. 엄마였죠. 잠시 창문을 내다 보라는 전화였어요."

전과는 달리 그녀의 말투에는 미소가 섞여 있었다.  

"초록색 잔디 가운데서 엄마가 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어요. 밝게 인사하는 엄마를 보는데 이유 없이 웃음이 나더라고요. 동시에 그동안 생각했던 모든 의문들이 없어지는 기분이었어요. 뭐랄까, 굳이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구나, 내가 지금 이유 없 행복을 느 것처럼 인생도 정답을 모른 채 그저 웃으며 살아가면 되는 거구나, 하고요."


위로 들어 올린 그녀의 턱선을 따라 길게 뻗은 그녀의 머리칼은 허리츰까지 내려와 있었다. 작게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의 머리칼을 쓸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바람을 느끼는 건지, 과거를 회상하는 건지알 수 없었다.


"엄마에게 인사하려 밖으로 나왔어요. 그런데 시야가 달라져서였을까요? 날씨가 얼마나 화창했는지, 나무가 얼마나 싱그러웠는지, 구름이 얼마나 광활했는지,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이 눈 속으로 채색되는 듯했죠. 의미를 찾는 것에 몰두한 나머지 모든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었던 거였어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무튼 그렇게 썼던 글을 모두 지우고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는 결말이에요."

"해피앤딩이네요."


바람이 불자 그녀는 머리칼을 잡으며 말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해결된 건 아니었어요.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졌지만, 제 행동과 신념에 대한 의심은 계속 들었거든요."

"그건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책이었어요. 어느 날 읽은 책에서 누군가 주인공에게 질문했어요. ' 신을 왜 믿는가?', 그에 대한 주인공의 답변'그냥 믿기로 했다.' 였죠. 그러니까, 아무런 근거 없이 믿기로 정했으니 그냥 믿는 거였어요."


그녀는 흩날리던 머리칼을 오른쪽 어깨로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오, 순간 머리가 핑 돌았어요. 그렇구나, 그냥 믿으면 되는 거구나!"

"새로운 관점이 생긴 거네요."

"모든 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해결되는 것 같아요. 그날로 저는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지도 않았고, 행동에 의심하지도 않았어요. 주인공처럼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가 된 거죠. 내가 왜 사는 지도 '그냥 살기로 했다.'가 되어버린 거예요. 단순하지만 가장 명확한 답이었죠."


그때 그는 간신히 참고 있던 재치기를 했다. 콧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그는 멋쩍게 말했다.

"날이 많이 춥네요."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있던 휴지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거 쓰세요."

"감사합니다."

그의 귀도 손 끝처럼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하, 추운 와중에 제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웠어요.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조금 더 있다 갈게요."

", 손난로 고마웠어요."

그는 그녀에게 손난로를 돌려주었다. 그의 체온인지 모를 뜨거운 열이 손난로를 타고 그녀에게로 닿았다.

그는 가게 문을 열며 그녀에게 말했다.

"참, 들어오면 해론의 연애도 들려줘야 해요."

"물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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