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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13. 2024

스스로 열고 들어간 뒤주

[잡담술집] 17화

풍경이 딸랑이는 소리와 함께 벤치에 홀로 앉은 그녀는 사라지는 입김을 보며 눈을 감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려 할 때 차가운 바람 한 줄기가 그녀의 목을 간지럽혔다. 시리다기 보단 시원하다는 표현이 맞을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목에 앉은 바람은 그녀의 체온에 머물다 아른거리는 취기를 데리고 사라졌다.

"좋다."

얼어붙은 길 위로 불규칙하게 들리는 발소리, 경로를 이탈한 바람이 방황하는 소리, 가게의 문 틈을 타고 새어 나온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상황을 더 깊이 저장하기 위해 그녀는 허리를 피고 자세를 고쳤다.


그때 풍경이 딸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가게 문을 열고 나오는 걸음은 멀리 가지 않고 그녀의 앞에서 멈춰 섰다.

"어, 아까 그분 맞죠?"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보아하니 취기는 완전히 빠진 듯했다.

" 앉아도 되나요?"

"그럼요."

그녀는 자리를 옆으로 옮겨 차가운 벤치를 체온으로 다시 데웠다.


"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당황하셨죠?"

"아니에요. 좋은 답변이었거든요."

젊은 여자는 머리칼을 귀에 꽂으며 웃었다.    

"사실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나지 않아요. 그래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젊은 여자는 목젖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에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매력적인 여자였다.

"참, 소개가 늦었네요. 사피라고 해요."

"해론이에요."

사피는 입고 있던 외투 자크를 올리며 말했다.

"가만히 앉아있기 참 좋네요. 마침 이런 시간이 필요한 참이었는데."


사피는 그녀와 나란히 앉아 흘러가는 시간을 느꼈다. 바쁘게 움직이는 태엽 속에 그들만이 멈춰있는 듯했다. 세상의 등장인물이 아닌 관찰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 사피의 눈으로 분주히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회사원이 보였다. 이제야 일이 끝났는지 회사원은 목에 사원증을 그대로 걸어둔 채 택시를 잡고 있었다.

"하아-"

사피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름다운 풍경을 앞에 두고 사피는 고개를 내리고 있었다.

"다들 멋진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서요. 저만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요."

여전히 땅에 시선을 꽂은 채 그녀에게로 몸을 틀었다.

"죽겠어요. 열등감 때문에 숨 쉬기가 힘들어요."


사피의 속눈썹에는 떨어지지 않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큰 눈망울 때문인지 촉촉이 젖은 망아지 눈 같았다.

"모두가 열심히 해서 이룬 업적일 텐데도, 무작정 질투하고 열등감을 느껴요."

사피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노력도 안 하면서 열등감에 찌들어만 가는 자신을 보면 한심해서 눈물이 나요. 이대로 폐인이 되어 죽어버릴 것만 같아요."

달 빛 아래 조명 없이 빛나고 있는 사피는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오늘 아침에는 친구들에게 무시받는 꿈을 꿨어요. 열등감을 넘어 자존감까지 낮아진 저에겐 당연한 꿈이었죠."

"특히 어느 부분에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녀는 들고 있던 손난로 사피에게 건넸다. 사피는 훌쩍이며 고개를 꾸벅였다.

"공부로서의 성공인 것 같아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어요. 결국 성적에 맞는 이름 모를 대학교에 입학했고 노력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공부를 손 놓게 되었죠. 그때부터 친구들이 공부로 성공했다는 말만 들으면 저에게 잘난 부분이 있을 텐데도 스스로를 구석으로 밀어 넣어 버렸어요."


과부하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사피는 눈을 감았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은 속눈썹에 붙어 달빛을 머금고 있었다. 서로 엉겨버린 속눈썹이 간지러웠는지 사피는 손으로 눈을 비비며 말을 이었다.

"그들이 저보다 더 열심히 살았겠죠.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배가 아픈 걸까요? 저는 대학교를 다니는 동시에 운 좋게회사에 취직했어요. 나름 전문직 명성도 좋았어요."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질문을 던지며 사피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간 쌓 힘듦이 많 모양이었다.

"좋은 직장을 얻었으니 열등감이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명문대 다니는 친구 앞에서 저는 다시 한없이 작아졌어요. 친했던 사이였는데도 열등감 때문에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가 없었어요.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내가 저 친구보다 많이 못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녀는 사피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잘만 움직이다가도 아래로 쳐져버리고 입술 양쪽이 빵빵해지다가도 다시 힘 없이 꺼져버렸다.

"직장은 얼마 다니지 않고 그만뒀어요. 일이 버거웠고 적성에 맞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만둔 순간에도 저는 스스로를 '1년도 못 버티고 퇴사한 한심한 놈'이라고 생각했죠. 열등감이 자존감까지 다 먹어버린 상태요."


사피는 암흑으로 진해져만 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나뿐인 달과 여러 개로 빛나고 있을 별들은 사피에게 그저 자신의 시선을 방해하는 방충망 정도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사피는 가로로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처음 본 사람에게 그만 주절거리고 말았네요."

"모르는 사람일수록 말하기 더 편하잖아요. 어떤 말을 해도 나를 판단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반대로 저도 사피의 모든 면을 배제한 채 들을 수 있고요."


그녀는 코트 오늘 쪽 주머니에 꼬깃하게 들어있던 아몬드를 꺼냈다.

"먹을래요?"

"감사합니다."

사피는 아몬드 한 개를 집어 앞니로 쪼개 먹었다. 제법 귀여운 토끼 같았다.

"늘 삶에 동반되는 게 열등감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다시 시무룩해진 사피를 보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 열등감을 어떻게 조절하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정도에 따라 자기 계발에 도움 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웅크린 채 살아가게 하는 뒤주가 될 수도 있죠."

"뒤주라, 조금 무섭네요."

"사도세자가 갇혀있던 뒤주와 저희가 들어간 뒤주의 차이점이 뭔지 아나요? 저희의 뒤주는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는 점이에요. 이 말은 즉, 스스로 다시 나갈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행동은 알다시피 뒤주 뚜껑을 여는 거예요. 바로 열등감을 직면하는 거죠."


사피는 그녀를 향해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열등감과 직면한다고요?"

"본인이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거예요."

다시 바닥으로 고개 숙인 사피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이미 제가 열등감 덩어리라는 걸 아는걸요."

그녀는 아몬드를 건네며 열심히 받아먹는 사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 말은 자존심 부리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나는 약해. 그래서 열등감을 느끼는 건 당연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 연민을 버리면 모든 것들이 조금씩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 부분에서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본인이 열등감을 느낀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거든요."

"자존심 강한 여자였군요."

"스스로에 한정해서요."


순간 들려오는 경적소리에 사피는 이어질 그녀의 말을 들으려 몸을 가까이로 옮겼다.

"그렇게 열등감을 받아들인 후 원인과 해결책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전에 스스로에게 해야 하는 질문이 하나 있어요."

그녀는 사피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열등감을 왜 해결하고 싶니?"

그녀는 다시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이 질문에 대한 사피의 답변은 뭔가요?"


달 옆으로 가장 빛나고 있는 별은 금방이라도 구름에 묻힐 것만 같았다. 한참을 말없이 생각하는 사피는 가게 앞으로 서너 명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아무런 전제와 벽이 없는 대화를 하고 싶어요. 그 사람의 성적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보고 대화하고 싶어요."

사피는 아래로 시선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명문대 다닌다는 친구, 제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열등감 때문에 그 친구와 온전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어요."

사피는 내쉬는 한숨에 작은 목소리를 실었다.

"말도 안 되는 열등감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과 멀어져야 한다니…"


연갈색 머리 사이 사피의 가르마는 유독 하얗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사피의 머리에 살며시 손을 얹고 말했다. 날씨 때문인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저도 그랬었거든요."

"해론도 열등감이 있었나요?"

"그럼요. 어쩌면 사피보다 더 심했을지도 몰라요. 저는 교재 했던 남자에게 열등감을 느꼈어요. 비교의식이 생기는 순간 애인은 더 이상 이성이 아닌 우상이 되어버렸죠. 그래서 애인을 보며 혼자 주눅 들기도 했고 사피가 말한 진정한 대화도 하지 못했어요."

그녀는 과거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을의 역할을 자초해 한없이 작아졌던 자신의 행동이 지금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허벅지 아래로 구겨진 코트를 피며 그녀는 말했다.

" 열등감은 언제부터 느꼈던 것 같아요?"

사피는 미간을 찌푸렸다. 꽤나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언제부터라"

그때 사피표정번 더 일그러졌다

"아, 고등학생 때 친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때부터 열등감이 시작된 것 같아요." 


달을 덮은 구름은 사피의 표정을 가려주었다.

"가장 친했던 친구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저를 따돌리고 조롱했어요. 이유는 단지 제 얼굴 생김새가 싫어졌대요. 아마 누군가의 뒷담을 통해 자신의 무리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황당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요. 그렇게 저는 왕따가 되었고 매일을 울며 밤을 지새웠죠."

이내 구름에서 해방된 달빛눈을 질끈 감은 사피의 콧등을 비췄다.

" 친구는 공부를 잘했어요. 모든 선생님들이 칭찬하고 좋아할 정도였죠. 왕따의 주동자가 피해자인 저보다 행복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괴로웠어요. 그때부터 그 친구보다 무조건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친구를 이길 수 없으니 공부로 인한 성공에 더 집착하게 된 것 같아요. 그게 자연스레 열등감으로 이어진 것 같고요."


사피는 고개를 내리고 손난로로 데워진 손을 포개 코를 감 쌓다.

"매일을 열등감을 쥐고 살았어서 지금은 정 제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이제는 배신한 사람 때문에 저를 놓치고 싶지도 않고 열등감이 마음원동력이 되지도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말 제가 원하는 인생을 살고 싶어요. 그렇지만 매일을 타인과 비교하며 살아 저는 제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낼 방법을 모르겠어요."


 그녀는 빈 아몬드 봉지를 코트 주머니에 넣으며 사피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볼래요?"

사피는 그녀가 말한 대로 눈을 감고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녀는 사피가 들을 수 있도록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주변에 뭐가 보이나요?"

사피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제가 눈을 감고 있는 모습만 그려져요."

"뭐가 들리나요?"

"해론의 목소리와 제 숨소리가 들려요."

"좋아요. 다시 눈을 떠 볼래요?"


사피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다보았다.

"원하는 걸 찾기 위해 썼던 저만의 방법이에요.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암흑이라는 세상 속에 오직 나만이 존재하죠. 타인도, 비교할 대상도 없어지기 때문에 무엇도 상관하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걸 찾아낼 수 있어요. 사피에게도 통했으면 좋겠네요. 언젠가 진지하게 해 봐요."

사피는 수줍은 듯 입술을 얇게 피고 고개를 숙였다.

"해론, 고마워요."

그녀와 사피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들 사이로 소리 없는 비행기가 동선을 그리며 거대한 먹구름을 뚫고 지나고 있었다.


어디론가로 넘어가버린 소리 없는 비행기를 좇아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가게 안으로 피드윌과 젝스가 보였다. 둘은 술을 맞대고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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