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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14. 2024

살면서 한 번만 느낄 수 있는 흥분

[잡담술집] 18화

"이제 숨 좀 돌리겠네요."

젝스는 소매를 접으며 플라스틱 잔에 위스키 따랐다.

"하하, 고생 많았어요."

크게 들이마신 젝스는 잔을 내려놓고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혼자 오신 여자분과 이야기하던데 아는 사이인가요?"

"오늘 처음 만났어요. 제가 같이 마시자고 했고요."

젝스는 수염에 흐른 위스키를 옷깃으로 닦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피드윌이 먼저 마시자고 했다고요?"

"그냥, 말을 걸고 싶었어요."

"호오-"


화재를 돌리려 그는 의자에 걸어둔 검은색 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해론과 안주거리 좀 골라봤어요."

"그녀의 이름이 해론이군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창문으로 고개 돌리는 그를 따라 젝스도 밖을 보았다. 느릅나무 옆 벤치 위로 그녀와 사피가 나란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붙어 있는 그녀들의 어깨가 번갈아 들썩이는 모습은 온기를 나누며 이야기하는 햄스터 같았다.


그때 그의 뒤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그들을 부른 사람은 사피의 일행으로 건장한 체격에 얇은 속쌍꺼풀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얼굴에 젖살끼가 있는 것으로 보아 20대 초반 같았다.

그는 몸을 뒤로 젖히말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남자는 쭈뼛거리며 창문 밖을 가리켰다.

"다름이 아니고, 저는 밖에 앉아 있는 단발머리의 일행인데요. 제 친구 옆에 계신 여성분과 같이 술 드시지 않았나요?"

"네, 맞아요. 혹시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죠?"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남자를 보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말하라는 표시였다.

"사, 사실 제가 저 단발머리를 좋아하는데요. 그게, 아까 보니 여성분과 대화를 잘하시는 것 같아서요. 제가 여자랑 얘기를 잘 못해요. 특히 좋,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더요."

남자는 고개를 꾸벅이며 말했다.

"지금이 기회인 것 같아 불쑥 찾아왔어요. 방해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이미 들을 준비를 마친 젝스는 간이 의자에 앉은 채로 말했다.

"아는 사람도 아니고 저희에게 연애 상담을 하실 줄은 몰랐네요."

"친구들에게 말했다간 다들 절 대시도 못하는 머저리라고 놀릴게 분명해요. 단발머리, 그러니까 사피에게 제 마음을 전하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고요. 저를 모르는 분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어요."

머리를 긁적이며 남자는 작게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왜 인지 잘 들어주실 것만 같았어요."

그는 옆 의자를 뒤로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애상담만큼 재밌는 것도 없죠. 여기 앉으실래요?"


젝스는 부럭거리며 그가 줬던 검은색 비닐봉지를 뒤적였다. 감자 스낵이 들어 있었다.

"피드윌과 해론이 맛있는 걸로 골라줬군요. 안주는 준비가 되었고."

젝스는 수납장에서 동그란 유리잔을 들고 위스키를 꺼냈다.

"그쪽을 보자마자 생각난 잔과 술이에요."

"이제껏 가장 빨리 고른 것 같은데요?"

"연애상담이 시급한데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잖아요."

젝스는 남자에게 묵직해진 잔을 건네며 말했다.

"이건 서비스예요. 저는 아마 연애상담은 못 해 드릴 것 같으니 청취료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는 젝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하하, 이 녀석은 한 번도 연애를 해 본 적이 없거든요."


서로 대화가 오가는 걸 보면 그들은 꽤나 친한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수정구슬처럼 투명한 잔을 보고 있자니 찰랑이는 위스키 위로 사피와 자신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다. 혹여 그녀에게 거절당하는 모습이라도 비칠까 서둘러 잔을 들었다. 꿀맛이 은은하게 도는 위스키는 거칠어진 을 부드럽게 데워주는 듯했다.

"이제 얘기해 줄래요?"

남자는 과자를 집으며 말했다. 긴장 됐는지 과자를 한번 떨어뜨렸지만 그들은 못 본 체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사, 사피를 좋아해요. 그런데 누군갈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좋아하는 여자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대화를 어떻게 주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크고 건장한 체격 아래로 수줍음이 가득한 남자의 반전매력은 꽤나 귀여웠다. 설명하면서도 볼이 빨개지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자신의 첫사랑이 떠올랐다.

그는 하얀 종이 위로 첫사랑을 띠우며 당시 본인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자신감 있다가도 첫사랑 앞에만 서면 버벅거리던, 발을 동동 구르던 자신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했다.

첫사랑과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그때 느낀 감정은 지금까지도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는 느끼지 못할 가장 순수하고 여린 마음이었다.


나의 모든 세계가 타인의 것이 되는 마법, 그 사람의 기분 내 삶의 일기예보가 되는 신비. 이 모든 걸 처음으로 겪었을 때의 혼동과 흥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느꼈을 몽글한 설렘을 눈앞의 남자가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는 그저 이 말만을 전하고 싶었다.

'부디 한 번뿐인 감정을 깊이 느껴주길. 그리고 소중히 대 주길.'


남자는 입술을 우물쭈물 거리며 작게 말했다.

"이러다가 사피에게 제 마음도 전하지 못하고 놓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돼요."

남자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녀와 알고 지낸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18살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5년 정도 됐요."

웅얼거리다시피 대답하는 그를 보며 젝스가 말했다.

"오, 생각보다 오래되었네요. 그런데도 대화하는 게 힘든가요?"

"제가 사피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만 보면 벙어리처럼 말을 버벅거려요. 한 문장을 넘기기가 힘들죠. 그 한 문장도 머릿속으로 수많은 시물레이션을 돌려보고 나서야 꺼 수 있어요."

"연애 상담의 목적은 그녀와의 대화 개선을 위함인가요, 아니면 고백하기 위함인가요?"


남자는 고백이라는 말을 듣자 빨갛던 얼굴이 더 짙은 색으로 붉어지는 듯했다. 주근깨가 생길 수 있는 모든 영역이 상기되어 있었다.

"고, 고백이라뇨. 아직 대화도 잘 못하는데…"

그들의 시선을 피해 이리저리 굴러가는 남자의 눈동자는 포켓을 찾아 헤매는 당구 볼 같았다.

젝스는 주먹 쥐고 들어 올렸다. 입가에는 미소가 띠어있었다.

"용기 있는 자만이 사랑을 쟁취할 수 있는 법! 남자는 배짱이 커야죠. 대화는 이뤄졌다 하더라도 고백하지 못하면 친구 이상의 관계는 될 수 없어요. 사피가 다른 남자와 사귀게 되어도 괜찮은가요?"

"그, 그건 안 돼요."

남자는 고개를 연가로저었다. 그는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선 대화하는 방법부터 찾아보죠."

"네…"

"참, 서로 이름도 몰랐네요. 제 이름은 피드윌이에요."

"저는 젝스예요."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젝스를 바라보았다.

"웬일로 본명을 말하죠?"

젝스는 비틀어진 옷깃을 피며 말했다.  

"남자들의 대화에 거짓이 들어갈 순 없죠."

남자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웃었다.

"하하, 제 이름은 이월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그는 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럼, 한 모금 시고 시작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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