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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18. 2024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 것

[잡담술집] 20화

모르는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이월을 보며 사피 물었다.

"여기서 뭐 해?"

이월은 짧은 순간동안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그러고는 잠깐의 정적을 보내고 창문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네가 안 보이길래 찾으러 갔다가, 밖에 있는 걸 보고 기다리다가, 여기에 두 분이 계시길래 나도 껴봤어."

어딘가 문장이 이상한 이월의 말에 그와 젝스는 소리 없이 웃었다.

"웬일이야.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얘기를 다 하고."

사피는 그와 젝스를 번갈아 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월의 일행이에요. 혹시 이 친구가 실례하진 않았나요?"

젝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가로저었다.

"전혀요."

젝스는 작업테이블 옆으로 서랍 틈에 끼어 있던 핑크색 껌을 꺼내 이월에게 건넸다.

"이건 선물이에요. 입에서 좋은 향이 나게 해 주죠."

아직 눈 아래로 홍조끼가 남아있는 이월은 껌을 받으며 연신 고개를 꾸벅거렸다.

"오늘 정말 감사드렸어요. 여러모로."


그녀는 단체석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보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요?"

"그냥 남자들의 얘기였어요. 해론은요?"

"치, 저희도 그냥 여자들의 대화였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젝스를 바라보았다. 손끝에 기름기가 진하게 묻어 있었다.

"젝스, 감자 스낵이 입맛에 맞았나 봐요. 다행이에요."

젝스는 이마를 짚었다.

"그새 피드윌이 제 본명을 말해 줬나 보네요. 이젠 명찰에 본명을 적어 둘 까봐요."

그는 웃으며 입을 가렸다.

"실수였어요. 용서해 줘요."

"농담이에요. 해론, 과자 잘 먹었어요."

"젝스도 제 이름을 알게 된 모양이네요. 저도 서비스 고마웠어요."


그는 그들을 번갈아 보며 손으로 눈을 얇게 찢었다.

"젝스가 서비스를 줬군요. 나도 서비스 줘요. 제가 여기서 제일 단골이란 말이에요."

"하하, 알겠어요. 지금 만들어 드릴게요."

그때 그들 뒤로 풍경이 여러 번 세차게 울렸다. 연이어 계속되는 풍경의 울림은 문 사이로 많은 걸음들이 들어서고 있음을 알게 했다.

"아무래도 저는 공짜 술은 마실 수 없나 봐요."

젝스는 허리춤에 두른 앞치마에 마른 손을 쓸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피드윌, 적당히 아무거나 따라 마실래요?"

"그럼요. 잘 마실게요."


누군가의 외투를 타고 들어온 바람은 그녀의 머리칼을 엉키게 했다. 그녀는 머리를 손으로 쓸며 그에게 물었다.

"평소에도 손님이 이렇게 많나요?"

"원래 이 정도는 아닌데 금요일이라 그런 것 같아요."

"참, 오늘 금요일이었죠. 요즘 시간 개념이 없네요."

그는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웃었다.

"백수만 할까요. 저는 오늘이 평일인지도 몰랐어요."


그는 편의점에서 샀던 라면 튀김을 꺼내 포장지를 뜯었다. 과자의 부피 치고 작았던 그의 주머니 탓에 라면은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그녀는 라면 조각을 집으며 말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쪼개졌네요."

씹을수록 삐져나오는 기름은 위로 뿌려진 설탕을 녹여 탄수화물의 단 맛을 강화시켰다. 그녀는 라면 튀김을 먹고 있자니 3년 전 자취 했 때가 떠올랐다. 돈이 부족할 때면 종종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는데,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아도 모든 순간이 낭만이고 청춘이라며 매일을 웃고 다녔던 그때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녀는 아직 다 분해되지 않은 라면 튀김 위에 위스키를 부으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입에서 섞인 라면과 위스키는 달면서도 쌉쌀한 맛을 냈다. 묘하게 어울리는 맛이었다. 혼자 라면을 보며 웃는 그녀에게 그는 물었다.

"좋은 추억이라도 생각나신 건가요?"

그녀는 안주를 집어 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라면을 보니 자취했을 때가 생각나서요. 돈이 없을 때면 라면을 먹곤 했는데, 나름 다양하게 먹어보겠다고 어느 날은 구워 먹고, 어느 날은 튀겨 먹었었죠. 프라이팬이 없어 냄비에 기름을 붓고 라면 사리를 튀긴 날엔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요. 시커멓게 탄 냄비를 철수세미로 벅벅 긁어내면서도 재밌다고 웃던 시절이었는데... 참 행복했어요."


그는 턱을 쓸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행복과 여건은 반드시 비례하진 않는 것 같아요. 저도 지금 살고 있는 넓은 집 보다 원룸에 살았을 때가 더 좋았거든요."

"행복은 여건과 비례도, 반비례도 아닌, 그 어떠한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존재인 것 같아요."

"아요. 동시에 종속되지 않는 존재라는 건 제 마음대로 어딘가에 종속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 되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모든 것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모든 것에 종속될 수 있는 행복은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 요소되겠네요. 어렵고도 재밌는 게 행복이에요."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해론은 가끔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웃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엉뚱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나 봐요."

그는 잔을 들며 말했다.

"엉뚱한 해론, 이제 당신의 연애 이야기를 들려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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