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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20. 2024

사랑의 완성은 결혼일까?

[잡담술집] 22화

그녀는 깔려 있던 왼쪽 다리를 위로 포개 치마를 엄지로 쓸며 말했다.

"헤어져서 힘들어할 때 옆에 있어주던 친구가 있었어요. 예전부터 알고 지낸 남자애였는데 좋은 사람이라 곁에 두고 있었죠. 그날은 오랜만에 둘이 술을 마시던 때였어요."

"설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아요. 그날 그 친구는 제게 고백했고 저도 마음이 있었던 지라 그대로 사귀게 되었어요."


그녀는 위스키를 입에 넣고 두 번 나눠 마셨다. 기억과 추억을 차례대로 삼키는 듯했다.

"하얀 피부에 쌍꺼풀 없는 눈, 오른쪽 볼에 있는 점까지 저와 무척 닮은 사람이었어요. 둘 다 안경이라도 쓰면 남매 아니냐는 소릴 들을 정도였죠. 저 역시 그와 다투기라도 하면 제 자신과 싸우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녀와 닮은 남자라, 선이 뚜렷하고 진한 눈썹의 남자. 매력적이고 계속 시선이 닿은 것만 같았다.

 

"선배와 헤어지고 시간이 꽤나 지났지만 후유증은 어딘가에 계속 자리 잡고 있었어요. 피드윌처럼 다시는 연애하고 싶지 않았죠."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저를 그는 사랑에 아파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다시 도전하게 만들었어요. 무섭고 겁났지만 사랑에 빠질 용기를 줬어요. 어느샌가 저는 선배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와 새로운 사랑을 공유하고 있었죠. 우리는 자신의 무엇도 계산하지 않은 채 수많은 사랑의 형태를 나눴어요."


그녀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날이면 학교 운동장 뒤편에서 몰래 폭죽놀이를 했고, 쌀쌀한 바람이 부는 날이면 그의 코트 안으로 들어가 서로의 온기를 나눴고, 시린 바람이 부는 날이면 나란히 앉아 함께 뜬 목도리를 둘렀어요. 우리의 사계절은 사라지지 않을 시간 속에 셀 수 없는 추억들로 가득 메워졌어요."

꽃처럼 핀 그녀의 어그와의 연애가 얼마나 황홀했는지 알려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아름다웠어요. 행복해서 눈물이 났어요."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내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곧 이야기의 흐름이 바뀐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동시에 불안이 밀려왔어요. 언젠가 이 행복은 끝이 난다는 걸 무의식 중에 느꼈던 것 같아요. 좋은 사람이었지만 확실한 신뢰가 가지 않았어요. 언젠가 저를 떠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근거 없는 감이었어요."

그녀의 머릿속으로 가로등 전구 아래 엉겨 있던 벌레들 생각. 빛을 보려 들다가 서로 몸을 부딪혀 아래로 떨어진 벌레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랑이 뜨거웠던 만큼 스파크도 많이 튀었어요. 피드윌이 말했던 것처럼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을 이유로 서로를 원망하고 무시했죠. 그렇게 교제기간이 2년이 되어갈 때쯤, 그가 저에게 말했어요. '지쳤다' 고요. 그 말을 끝으로 저희는 헤어졌어요."


그녀는 들었던 잔을 내려놓았다. 취기가 오른 모양인지 볼이 약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두 번째 연애를 통해 얻은 게 있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사랑하는 사람을 보낼 수 있는 마음인 것 같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한 답변 보다도 그저 조용한 끄덕임이 좋을 것 같았다.  

그녀는 가만히 행동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시선은 테이블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사랑의 완성은 영원히 그 사람과 미래를 함께 하는 것. 즉, 결혼. 그것이 사랑의 성공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이루지 못했으니 스스를 책망하고 끝없는 우울 속에 파묻혀 살았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을 완성시킬 수 없다는 좌절과 함께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렇게 몇 날 며칠을 구석에 박혀 있는데 어머니께서 제 어깨를 쓸며 말씀하시더라고요. '사랑은 그저 한때 서로의 페이지를 맞대고 함께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다, 그러니 너는 이미 충분한 사랑을 한 거다'라고요."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사랑의 완성은 '영원한 미래 약속'이 아니 걸 알게 되었어요. 어느 한순간에라도 서로에게 사랑을 외쳤다면 그걸로 사랑은 이미 완성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녀는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날 저는 그를 보내줄 수 있었어요. 와의 사랑은 이미 완성된 거였으니까요. 그리고 그를 보내주는 것 까지가 사랑의 완성이었으니까요."

"헤어진 다는 건 왜 이렇게 힘들까요?"

"쎄요. 만남과는 다르게, 이별은 모든 걸 내주고 나서야 일어나기 때문 이 아닐까요?"

그는 그녀에게 냅킨을 건네며 말했다.

"고생했어요, 해론."

"하하, 고마워요."

그녀는 기름기를 냅킨으로 닦아냈다. 이제 그녀의 손은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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