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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19. 2024

이별해도 아프지 않은 사람

[잡담술집] 21화

"저는 세 번의 연애를 했어요. 첫 번째 상대는 대학교 같은 과 선배였어요.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었죠."

그녀는 입술을 엄지로 쓸며 말했다.

"오래가진 못했지만 처음으로 입맞춤 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입술에 남아있던 설탕 침샘을 자극시켰다. 그는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첫 키스를 떠올렸다. 저릿함과 부드러움이 상기되는 듯했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으려 하자 그는 자세를 고쳤다.    

"대학교를 입학하고 두 명의 선배가 저를 동시에 좋아했어요. 선배들도 서로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저를 두고 경쟁을 했죠. 저는 두 명을 향한 마음이 비슷해서 더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사람의 마음을 받았어요."

"오, 인기가 많았군요."


그녀는 가식적인 웃음소리를 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좋은 건 아니었어요. 사귄 선배는 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승부욕 때문에 고백한 거였거든요. 결국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문자로 헤어지자는 통보받았어요. 승부에 이긴 선배는 더 이상 저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차여본 저는 그동안 제가 마음을 거절했던 사람들이 생각났어요. 좀 더 친절하게 거절할 방법은 없었을까, 하고 자아성찰을 했죠."

"친절한 거절은 없을 거예요. 어떻게든 상처 받으니까요."

"건 그렇죠. 선배도 최대한 좋은 말로 헤어지자 했지만, 한동안은 계속 힘들었으니까요."


그녀는 머리칼에 가려졌던 이마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취기 때문인지, 가게 온도 때문인지 열이 조금 있었다.

"마음을 거절당해서 힘든 것도 있었지만 승부욕으로 저와 사귀었다는 게 화가 났어요.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저를 이용했다는 게 어이가 없었죠. 동시에 그가 했던 모든 행동들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게 충격이었어요. '나는 그동안 무슨 연애를  거지?' 하는 회의감이 몰려왔."


그녀는 손을 다시 내려두고 말을 이었다.

"차인 게 처음이었던 저는 막연히 울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헤어지고 나면 꼭 슬픈 노래를 들으며 밤새 울곤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소파에 쭈그리고 앉아 이별곡을 틀고 울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어요."

그녀는 입술에 은 설탕을 녹이며 말했다.

"헤어지고 나서야 그 사람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거였죠. 그저 누군가에게 차여서 힘든 것뿐이었어요."

"그렇군요."

"아무튼 저의 첫 번째 연애는 그렇게 끝이 났어요."


그는 그녀에게 안주를 건네며 물었다.

"그 사람과의 연애는 어떤 의미였나요?"

"토사구팽을 알게 해 준 연애였어요. 사람은 자신의 목적이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타인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줬죠."

"그렇군요."

"한 가지 더 있다면, 아까 말했듯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착각할 수 있다는 거요."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선배에 대한 마음을 착각했듯이 선배도 저를 향한 마음이 승부욕이었는지, 사랑이었는지 몰랐던 걸 수도 있어요. 사귀고 나서야 승부욕이었다는 걸 알 된 거겠죠. 자신의 마음을 분명히 알고 관계를 시작해야 자신에게도, 상대방에게도 거짓연기를 하지 않게 된 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녀는 과자를 잡고 앞뒤로 번갈아 보였다.

"시 말해서 대뜸 사랑 고백을 하기 전에,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확정 짓기 전에, 자신의 마음에 다른 이면이 있는 건지 확인해 봐야 함을 알게 된 거죠."

그녀는 과자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이 상처를 받거나,  자신이 아파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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