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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05. 2024

데자뷔를 겪는 이유

[잡담술집] 11화

적당히 오른 취기는 그들을 서로의 얼굴에만 집중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제 이름은 해론이에요."

" 피드윌이에요."

자기소개를 하면서도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그녀는 자신의 왼쪽 볼을 가리키며 말했다.

" 점이 있으시네요. 저도 같은 위치에 점이 있요."


그녀는 쌍꺼풀 없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 지었다. 그는 그녀의 왼쪽 볼에 난 갈색 점을 바라보았다.

"저도 같은 위치에 점이 있나요?"

그녀는 살이 닿지 않은 채 그의 볼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이쪽에요."

그는 그녀가 가리킨 왼쪽 볼 어딘가를 만져보았다. 로션을 바르지 않은 탓인지, 건조한 날씨 탓인지 푸석했다.

"도통 거울을 보지 않아 점이 있는지도 몰랐네요."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을 그녀를 상상하니 왼쪽 볼에 난 점 주위로 피부가 빨갛게 상기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두 번의 호흡을 쉬며 화재를 바꿀만한 주제를 찾았다. 그러고는 한 번의 호흡을 건너뛰고 방금 생각난 척 손을 맞닿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어떤 여자랑 대화하시는 걸 봤어요. 덩치 좋은 남자가 여자를 부축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던데,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그녀는 천장에 달려있는 장구 위로 눈을 올렸다. 상황을 떠올리는 듯했다.


"제가 혼잣말하는 걸 지나가는 길에 들었나 봐요. 혼잣말로 질문한 건데, 그분이 대답하신 거죠. 웃긴 상황이긴 했지만 도움이 되었어요."

"어떤 혼잣말이었나요?"

"음, 인생이 여행이라면 여행의 목적은 뭘까 하는 질문이었죠."

"그래서 뭐라고 답하던가요?"

그녀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상황과 대화를 모두 떠올린 모양이었다.

"'필요한 여정이니까'라고 답해주셨죠. 추가적으로 '인생이 정말 여행이라면, 죽는다는 건 여행이 끝났을 뿐 진짜 죽은 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 엄청난 답변이네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답을 듣게 된 거죠."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것도 그렇고, 인생이 여행이라는 말 자체도 신선한데요?"


그녀는 여전히 바빠 보이는 젝스를 바라보았다.

"젝스의 생각이었어요. 요즘 들어 인생에 대한 고민이 많아져서 그에게 물어봤거든요."

"인생에 대한 어떤 고민인가요?"

"밥은 왜 먹는지 확실하게 인지하면서 먹잖아요. 하지만 인생은 왜 사는지 모 채로 살아가는 것 같았어요. 저는 인생도 밥을 먹는 것처럼 왜 사는지 확실하게 알고 싶어요. 그래야만 인생을 잘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인생은 무엇인가, 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어요."

"확실하게 인지하는 것과 잘 사는 건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확실하게 인지하지 못해도 누릴 수 있다면 그게 잘 사는 거 아닐까요?"


그는 아몬드 한 개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뭐든 깊게 생각해 본다는 건 좋은 거니까요. 단지 '인생이 뭔지 알아야만 잘 살 수 있어'라는 생각은 버리라고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몬드를 받았다.  

"그렇군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는 까끌해진 목을 위스키로 축이고 코 끝을 검지로 만졌다.

"인생은 무엇인가, 저도 한때 고민했을 때가 있었죠."


그녀는 그에게 받은 아몬드를 바라보았다. 아몬드의 앞면은 알맞게 구워져 있었지만, 뒷면은 정도 이상으로 바짝 말라 있었다. 그녀는 아몬드를 입에 넣었다. 신기하게도 뒷면이 더 풍미가 강하고 맛도 좋았다.

입에 남은 아몬드를 마저 씹으며 그녀는 물었다.   

"피드윌은 인생을 뭐라고 생각하나요?"

그도 그녀를 따라 아몬드를 집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앞면이 바짝 말라 있었다.

"언젠가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우린 이미 죽었고, 지금은 과거 회상 중이다."


그녀는 허리를 앞으로 당기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테이블을 비추는 주황빛은 그녀의 연한 동공에 닿아 끝없는 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흥미로운데요? 인생이 여행이라는  종종 들어봤도, 과거 회상이라는 건 처음 들어봐요."

"하하, 지금 해론의 눈이 엄청 반짝이고 있어요."

"저는 제가 생각지도 못한 걸 듣게 될 때 엄청난 쾌락을 느껴요. 생각의 뿌리에서 새로운 한줄기가 나와 양분을 먹는 기분이죠. 그런 면에서 대화 정말 좋아해요. 무료로 생각의 영역을 확대한 건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잖아요."

그녀는 몸을 테이블 위로  당기며 그를 재촉했다.

"그래서 계속 말해 줄 수 있나요?"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요. 저는 책 속의 '과거회상'이라는 문장을 보고 생각했어요. 사람은 죽기 전에 주마등을 본 다고 하죠? 즉, '지금은 과거회상 중이자 주마등을 겪고 있는 단계'라고 생각할 수 있었죠. 하지만 당시에는 별생각 없었어요. 내가 죽었다니,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죠."

그는 깍지를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평상시와 같이 살아가는데, 어느 날 재방송이라도 보는 것처럼 모든 상황과 인물이 그대로 재연되는 경험을 했어요."

"데자뷔군요"

"맞아요. 저는 데자뷔를 통해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떠올렸어요. 그러고는 생각했죠. '우리는 이미 죽었고, 지금은 과거회상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 한번 더 반복되는 데자뷔를 겪는다. 그것은 인생이 '과거 회상'이라는 말을 뒷받침할 근거가 된다'라고요."


그는 엇갈려 낀 열 손가락 중 엄지를 빼 서로의 지문을 만졌다.

 "사실 인생에 대한 모든 말은 가설일 뿐이죠. 그렇지만 뭐랄까, '나는 이미 죽었고 모든 것은 끝난 상황이다'라는 을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허탈하긴 했지만 동시에 삶의 무게와 늘 갖고 있던 걱정이 덜어지는 것 같았. '이미 죽은 마당에 걱정해서 뭐 해? 그냥 세상구경이나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가진 채로요."

"그렇군요."


그는 굽어 있던 허리를 피며 말했다.

"사실상 100명이 있다면, 100명이 정의하는 인생은 모두 다를 거예요. 다만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도움 되는 정의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삶에 대한 무게가 컸기에 부담을 덜어주는 인생의 정의가 필요했어요. 물론 앞으로 정의는 계속 바뀔 수 있지만요."

"음, 결국 정답은 없는 채로 자신이 내린 정의가 중요한 거네요."

그녀는 크리스털 잔을 들며 말했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피드윌."

"별말씀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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