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사냥은 여러모로 마음의 안정을 준다. 아무것도 없는 나무가 앙상하게 눈이 쌓인 땅을 버티고 서 있는 스산한 풍경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집중할 것에만 집중하면 그만인 어찌보면 안온한 고독 같은 것에 나를 맡길 수 있다. 이제는 멀리 떨어진 마을에 이도 성하지 않은 노인네 하나를 남겨두고 올해 겨울에도 호랑이 사냥을 하기 위해 홀로 산에 올랐다. 이 높다란 산은 겨울이 오면 쌓인 눈과 이파리 하나 없이 검게 치솟은 동맥처럼 뻗은 나무들, 그리고 호랑이 몇 마리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산 중턱에서 가시가 돋친 나무들 사이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면, 생을 생으로 보내지 못하고 죽은 나무, 이를테면 굿을 위해서만 쓸모가 있는 향나무들, 그런 나무가 즐비한 하나의 동네, 군집을 이루는 시가지가 보인다. 불을 잘 때지 않아 간간히 연기가 나는, 마을이라고 할 수 없는 음산한 동네는 고요에 잠겨 있다. 이만큼 눈이 쌓였는데도 아무도 치우는 이 없이 조용히 집 안에서 남은 생을 세고 있을 사람들… …광주리에는 쥐들만 득실대고…발로 밟으면 눈밭은 저벅저벅 소리가 날 것이고… 단지 그뿐.
서른이 다 되는 동안 겨우 호랑이 세 마리를 죽일 수 있었다. 그들은 내가 찾는 호랑이가 아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호랑이였다. 내가 찾는 호랑이는 따로 있었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호랑이. 바로 백호였다. 백호가 있는지 없는지 나도 모른다. 내가 갖은 애를 쓰면서, 화승을 점화시키느라 여러 번 사정거리에서 그들을 놓치고 다시 따라가 기어이 탄환을 각각 그들의 가슴과 두개골에 박아 넣었을 때도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그토록 뛰어난 명사수였다는 아버지가 나조차 쏘아 죽일 수 있는 호랑이에게 당했을까? 그러지 않았을 것 같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말이다. 사실 나도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너무 어릴 적에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말이 맞는 게 어머니는 그가 백호와 싸우다가 사지가 뜯긴 채 산에 버려진 흔적을 찾아왔다고 했으니 실제로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신하지는 못한다. 처참한 흔적은 겨우내 썩지도 않고 마을이 점으로 내려다보이는 높은 바위에 얼어있었다고 한다. 얼어버린 땅에 강력하게 붙들려 있는 흔적은 도끼로 깨어서야 떼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시체가 아버지의 것이라는 건 단지 입고 있던 옷의 자락과 총 한 구, 그 총에 새겨진 성을 보고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흔적을 찾아 헤매던 어머니는 이제 노인이 되었고 나도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 노인은 백호를 본 적도 없으면서 아버지가 죽은 게 백호의 짓이라고 여겼다. 백호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의 원수였으며 죽여 없애야 할 대상이었고 어떻게 보면 나의 쓸모를 증명할 수 있는 욕망이자 갈망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다. 아버지의 아버지도 아버지처럼 죽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시체는 산속에서 찾을 수도 없었다. 총만 나뒹굴었다. 아버지의 총과 똑같은 그 총만은 살아서 내게로 왔다.
오르막길을 한동안 오르다가 표시해 놓은 흔적을 보고 해가 곧 질 것처럼 누워가는 걸 보았다. 오늘도 허탕이었다. 몇 달째 허탕이고, 몇 해째 허탕이었다. 백호가 정말 있기는 한 걸까? 알 수 없었다. 그저 나는 총을 물려받았을 뿐이고 이제 백호는 내 삶의 목적이 되었다. 얼마만큼 올라왔을까? 표식으로 가늠해보건대 산의 중턱 어디일 것이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겨울의 해는 짧았다. 쌓인 눈이 눈앞에서 하얗고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반나절 동안 숲을 헤치고 가끔 나오는 중간지대의 벌판을 뒤졌으나 발자국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해가 점점 기울기에 나무 등지에 묶어둔 빨갛고 파란 천을 따라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중턱에 있는 산장이었다.
그 오두막은 매우 좁고 낡았다. 매서운 눈발을 피해 몸을 녹이고 어쩌면 겨우내 고립될 경우 버티기 위해 오래된 마을사람들이 마련한 초서였다. 반나절 내내 눈이 내려서 오두막은 닫힌 눈동자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 눈동자에서 시꺼먼 길이 사립문 앞까지만 뚫린 듯했다.
백호를 찾아 나선 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조금 커서 사냥이 가능해졌을 때 차례로 두 호랑이를 해치웠다. 화승 한 대로만 나간 총알은 이들을 잠시 기절시키는 정도의 타격밖에 주지 못했다. 쇠 냄새가 나는 까만 재를 화승 입구에 넣고 불을 댕겨 단 한 발, 멀리서도 아닌 그저 바로 공격당하지 않을 거리에서 숨어서 맞췄다. 이윽고 집채만 한 호랑이가 쓰러지고 나면, 호랑이 뒤에 기습하여 칼로 목과 배를 사정없이 찔렀다. 피는 호랑이의 가죽과 칼과 내 손과 얼굴과 옷에 온통 튀었다. 어둑한 선혈의 피를 뒤집어쓰고 호랑이를 질질 끌고 조금씩 이동했다. 겨울 날씨는 죽은 호랑이를 썩게 하지도 않았다.
오두막집은 온통 거미줄과 먼지투성이었다. 다녀간 지가 한참 지났기 때문이다. 대체 몇 명이나 이 집을 거쳐 갔으며, 이 땅에서 사라졌을까? 손바닥만 한 마당과 방 한 칸, 부엌이라고 할 수 없는 아궁이 터가 이 오두막을 이루는 전부였다. 오두막 뒤로 해가 졌다. 아궁이 터에 쭈그리고 앉아서 부싯돌로 지푸라기를 모아 열심히 비벼 불을 붙였다. 불은 곧 차갑게 죽은 장작을 안쪽에서부터 빨갛게 태우기 시작했다. 불꽃이 불씨처럼 화르르 일어나다가 장작 전체에 불을 붙였다.
이제는 꺼멓게 색을 지워버린 하늘 아래로 나왔다. 마당에서 돌 몇 개로 표시해둔 곳을 삽으로 파냈다. 낡은 항아리에는 감자 몇 알이 굴러다녔다. 이전의 방문자가 넣어두고 간 것이리라. 감자는 오래되지 않아 보였다. 항아리는 오래된 것이었다. 감자에 묻은 흙을 털고 타는 장작에 던져 넣었다. 모두 여섯 개의 감자였다. 빨간 장작더미 속에서 감자는 새까맣게 재를 뒤집어쓰고 익고 있었다. 바깥 공기는 찼다. 부엌의 온기는 김이 되어 빠져나갔고, 안쪽의 바닥도 조금은 덥히고 있었다. 감자는 탄 맛이 났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종일 돌아다닌 탓에 말라비틀어진 나무뿌리라도 캐 먹을 판이었다. 녹인 눈으로 목을 축이고 내리 여섯 개의 감자를 까먹었다. 까만 재가 여기저기 묻었지만, 배가 고파서 뭐든 맛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던 감자인지는 모르겠다. 내일을 위해 여분을 남겨둘 필요도 없었다. 내일 백호를 잡지 않으면 한동안 산에 오를 일을 없을 것이다. 내일 해가 질 때까지 백호를 잡지 않으면 돌아갈 참이다. 아니, 반드시 잡을 참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덮여 있었다. 사람 하나가 누우면 그대로 꽉 차는 크기의 방에 앉아 짐을 풀었다. 화약과 탄환과 총신대를 점검했다. 밖은 이미 밤이었다. 덮인 방바닥의 온도가 생경하리만치 방내부의 공기는 찼다. 오래되고 찌든 옷가지를 여러 겹 겹쳐있고 늘 해오던 탐험, 소득 없는 행보만 계속하는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갑자기 이 방 안의 공간과 시간이 전연 새로운, 이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포함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방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했을까. 사냥꾼들의 마을, 마을 사람 중에서 백여 명이 나면 그중 오십 여명 정도가 살아남아 어른이 되고 그중에서 서너 명 안짝으로 사냥꾼이 되어서 결국 자식을 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던, 그 숫자가 도대체 몇 명일까. 오랫동안 사람이 찾지 않아 낡고 닳은 이 방의 바닥 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녀가고 몸을 뉘었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찢어진 문지방으로는 겨울의 얼어붙은 공기가 뾰족한 가시처럼 날아와 피부를 들추고 찌르듯이 박혀왔다.
방 안에 누워 그나마 따뜻해진 바닥에 한쪽 얼굴을 대고 잠을 청했다. 눈을 감았다. 바닥 아래로, 꺼멓고 차가운 동토, 그보다 더 아래의 어떤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얀 방이었다. 네모난 사각형의 방. 여태껏 본 적 없는 형태의 상자 같은 방. 네모난 사각형의 방. 바닥도, 천장도, 벽면도 온통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서 있는 벽면의 문 건너편에 까만 네모 칸이 그려져 있는 이상한 방이었다. 하얀 방에 네모난 문. 아니다. 문이 아니라 문도 없이 뚫린 어떤 어두운 입구. 그저 까맣고 네모나게 눈앞 가까이 혹은 멀리 펼쳐진 그곳은 기이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창문도 없고 흙에 창호를 바른 것도 아니고, 질감은 느낄 수 없이 하얗기만 한 떠 있는 방, 아니 방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곳은 대체 뭘까? 나는 눈앞에서 이글거리면서 타고 있는 것 같은 더 작은 까만 네모 칸을 향해 걸어갔다. 몸이 가벼웠다. 이곳은 어딜까? 꿈같지 않았다. 모든 게 아득해졌다. 호랑이, 오직 호랑이, 하얀 호랑이만 찾고 있었는데…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까만 벽 속으로 들어갔다. 이상한 종소리 같은 게 등 뒤에서 났다. 돌아보니 방은 온데간데없었고 눈이 내린 산 중턱 어디엔가 내가 놓여 있었다. 사방에 눈이 쌓여 있었다. 발이 눈에 푹푹 빠졌다. 맨발은 금세 얼 것 같았다. 주위는 까만 나무들이 빽빽이 늘어 서 있었다. 잎도 없는 나무는 밀집한 탓에 하늘을 온통 가리고 서 있었다. 하늘 위로 조금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밤인지 낮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낮인 것 같았다. 언덕으로 높게 솟은 산기슭을 올랐다. 발은 어느새 파랗게 색이 빠지며 얼어버렸다. 감각이 없었다. 도끼로 잘라도 아무 느낌이 없을 것 같았다. 올라가는 내내 흰 눈은 차가운 속도로 흩어졌다가 뭉쳐서 발과 어깨, 얼굴을 덮었다. 추위는 그때까지는 느끼지 못했는데 갑자기 등 뒤부터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칼날이 되어 덮쳐 오는 듯했다. 그와 함께 잘못 만든 종의 내벽을 뾰족한 것으로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다.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네발짐승이 눈을 노랗게 번뜩이고 서 있었다. 이를 갈고 있었다. 쇳소리가 끼익 끼익하고, 온통 하얀 털을 뒤집어쓴 호랑이 한 마리의 입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 나고 있었다. 흰털은 나뭇가지의 그림자에 의해 군데군데 어둑한 빛으로 반짝였으며 발톱은 상상 이상으로 날카롭고 길게 자라있었다. 이 괴물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몸집은 나의 세 배, 아니 네 배는 되어 보였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나뭇가지마저도 이 짐승 앞에서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고 긴장하고 서 있는 것처럼 멈춰있었다.
짐승은 하얗고 까맸다. 짐승이 입을 벌리자 주변의 모든 풍경이 입안으로 구겨져서 펼쳐졌다. 나는 아마 다시 꿈을 꾼 것 같았다. 기절했는지도 모르고 죽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와 함께 모든 세상은 어둠에 잠기고 호랑이의 내부, 아마도 목구멍의 통로만이 빛이 나는 그 길을 따라 나는 빨려 들어갔다. 나무와 산과 하늘과 땅과 집과 울타리, 성과 달까지도 짐승의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울퉁불퉁한 주름을 따라 나는 굽은 자세로 짐승의 뱃속으로 떨어졌다.
그곳은 마치 동굴 같았다. 한쪽에는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조금 높은 곳에는 세계의 잔해가, 모래나 벽돌, 나무판자와 옷가지가 폭풍을 고스란히 맞은 마을처럼 흩어져 있었다. 천장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점액질의 물이었다. 이상하게 그곳은 짐승의 뱃속이 아니라 방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동굴은 나의 머리보다도 훨씬 높았다. 천장만 높을 뿐 아니라 바닥도 깊었고 넓었다. 나 같은 사람이 너덧 명은 있어도 거뜬할 만큼의 크기였다. 공기가 축축하면서 바닥이 폭신했으며 따뜻했다. 어느 계절의 풍화나 천재지변에도 끄떡없을 것 같은 안온한 공간이었다. 벽만 적당한 간격을 두고 살아 숨 쉬는 듯이 일렁였다. 온통 울퉁불퉁한 벽은 마치 뜨겁게 달군 쇳덩어리가 지나간 것처럼 다양한 높이의 유선이 그어져 있었다. 물의 수위가 계속 바뀌어 생긴 흔적일지도 몰랐다.
물웅덩이를 피해 조금 높은 바닥으로 기어갔다. 네 발로 조심스럽게 꿈틀대는 벽을 따라 동굴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둔덕 비슷한 것이 솟아 있었고 그 아래로는 온갖 잔해가 쌓여 뭉쳐져 있었다. 어두워서 겨우 눈을 밝혀서 들여다보고는 놀랐다. 사람과 짐승의 뼈 할 것 없이 온갖 육식의 흔적이 쌓여있었다. 뼈는 녹지도 닳지도 않고 모래와 천, 돌멩이와 나뭇가지 같은 것들과 함께 뭉쳐져 있었다. 아직 덜 썩은 시체도 즐비했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물은 웅덩이가 되고 그 속에서는 머리카락이 물풀처럼 흩날렸다.
어둡지만 면면이 들여다보면 온갖 썩은 시체가 엉켜있는 모습에 놀란 나는 벽에 붙어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애썼다. 동굴 속은 너무나 어두웠다. 웅덩이를 이루는 곳만 간헐적으로 빛이 났다. 여긴 대체 어딜까? 호랑이의 안일까? 알 수가 없었다. 꿈일까? 그것도 확실치가 않았다.
어둑어둑한 내부는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웅덩이를 지나 더 좁고 어두운 내부로 걸어가니 작은 방 같은 곳이 나왔다. 아득한 어둠, 푹신한 감촉… 몸을 둥글게 말아 누웠다. 어둠 일부가 되어서 정신만 떠다니는 상태로… 그마저도 몽롱한… 편안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양가적인 감정은 성스러운 균형을 이루어 알 수 없는 그 어둠 속에서 나를 감싸 안았다. 깊은 어둠 속에서 보이는 건 아마도 물웅덩이, 웅덩이들에서 올라오는 간헐적인 빛이었다. 빛은 별처럼 반짝거렸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비춰주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에 또다시 별이 떠올랐다. 깜빡깜빡. 하얀 점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가를 반복했다. 아득한 어둠 속으로, 방 안의, 그보다 더 안쪽에서 빛은 눈이 녹듯이 허물어져 갔다.
어둠 일부가 되었을 때이다. 갑자기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있으니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다가오는 소리도 뚜렷해졌다. 어떤 기이한 존재감이 감지되는 거리에서 여자가 내게 말했다. “저기요, 저기요.” 여자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쯤 여자의 손이 내 얼굴을 더듬었다. 나는 놀라서 깨었다. 여자의 두 눈이 적은 빛을 반사하며 깊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죠?” 내가 말했다. 여자는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하고 내 얼굴을 더듬으며 말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건 나도 마찬가지 였다. “아마도 호랑이 뱃속 같아요.” 여자가 말했다. 희미한 그 얼굴을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잘 보이지 않았다. 여자의 얼굴은 오래 알던 얼굴 같기도 했고 새로 안 얼굴 같기도 했다. “호랑이 눈을 보고 놀라서 소리치기도 전에 이곳으로 들어왔어요.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어요.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어서 하염없이 있었더니 대체 시간이 얼마큼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네요.”여자가 말했다. “바깥으로 나가려고 해봤어요?”내가 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보시다시피… 아니 안 보이시겠지만 아무것도 없어요. 무기도 도구도 힘도 없어요. 손으로 어떻게든 이 벽을 긁어 내보려다가 말았어요. 제 손톱만 다 없어져 버렸어요…. 도무지 나갈 방도가 없었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나갈 수가 없는 곳인가? 호랑이 뱃속이 맞는 걸까? 유선이 여기저기 남은 동굴의 내부는 아늑하고 따뜻했다. 어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평생 이곳에 살아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시간마저 이곳에서는 정지해 있는 것만 같았다. 여자가 내게 다가와 다시 속삭였다. “여기를 나가고 싶어요. 여기를 나가야 해요. 당신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두꺼운 벽을 뚫고 우리는 나가야 해요. 가지고 있는 것이 있잖아요?” 여자의 목소리는 마치 노인이 젊었을 때의 목소리 같았다. 작고 낮은 목소리는 동굴의 무수한 곡선이 갈라지면서 내는 공명음일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면 일찍 죽어버린 자매의 목소리일지도 몰랐다.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고? 품속을 뒤적였다. 이윽고 나는 주머니칼을 꺼내 들었다. 손을 벽에 뻗어 여자의 손톱이 떨어진 곳, 여자가 나가려고 애를 쓰던 벽의 한구석에 칼을 찔러 넣었다. 여자는 계속 속삭였다. “더 세게 찔러야 해요, 더 세게….” 칼날이 벽을 찌르자 피 같은 액체가 어둠 속에서 울컥거리며 사방으로 튀었다. 얼굴에 진득한 액체를 뒤집어쓰고 계속 칼을 찔러 넣었다. 나가면 이 방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칼은 더 깊이 들어갔다. 조금씩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바깥의 찬 공기가 빛과 함께 파도처럼 쓸려 들어왔다. 바깥에서 아주 작은 틈, 칼날의 이면으로 하얀빛이 강하게 내리쬐어 비추었다. 방 안은 일직선으로, 이윽고 사방으로 빛이 번졌다. 그런데 틈을 벌리는 내가 아니라, 틈 바깥에서, 틈 사이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내가 보였다. 내가 나를 보았다. 기이한 일이라 여겼다. 그러다가 눈을 떴다.
다시 방이었다. 숯이 다 타고 식어버린 건지 방바닥부터 냉골이었다. 골방의 천장이 보였다. 아침의 새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웠다. 녹인 물로 목을 축이고 겉옷을 입고 방 바깥으로 나갔다. 세상이 온통 환했다. 잠이든 건 잠깐이었는데 세상은 어느새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비몽사몽 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머릿속은 차가워졌고 가슴은 뜨거워졌다. 꿈은 깨었지만 꿈의 기억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총을 메고 칼을 가슴 안에 깊숙이 품었다. 새는 계속 울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다. 그러나 아침이다. 사립문을 열고 그대로 섰다. 멈추어 섰다. 눈이 온 사방 천지에 쌓여 있었다. 오늘은 호랑이를 만날 수 있을까? 하얀 호랑이를? 차갑게 얼어붙은, 그러나 모든 것을 덮어버린 눈 위를 걷기 시작했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었다. 발자국을 깊고 길게 남기며 걸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오늘은 왠지 백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