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교육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왜 배워야 하는지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구구단과 알파벳, 인수분해를 배웠고 중학교를 들어가니 중간고사라며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공부를 잘해야 하는 기계가 된 듯 꾸역꾸역 지혜가 아닌 지식을 외웠다. 물론 살아가는데 필요한 교양과 지식을 배우고 정확히 알고 있는지 평가하는 시험 자체에 불만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왜’ 교양을 배우고 ‘왜’ 지식을 쌓아야 하는지, ‘왜’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아직도 내신과 수능 점수를 잘 받아야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준 사람이 없었음에 분개했다. 충분한 납득이 아니었어도 괜찮은데. 그저 이런 모습이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이라며 푸념 섞인 말이라도 몇 번 해줬으면 어린 눈치로라도 감을 잡았을 텐데. 학교는 이것이 유일한 정답인 것 마냥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요구했다. 공부는 잘해야 하고 시험은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고 명문대 진학이 네 십 대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이렇게 말하면 엄청 공부를 잘했던 범생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평범한 학생이었다. 너무 못하지도 잘하지도 않는 중상위권 학생. 그래서 더 애매했다. 차라리 못하거나 아예 최상위권에 속했다면 공부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거나 '사'자 직업을 가졌을 텐데 말이다. 굳이 가까웠던 쪽은 후자였기 때문에 헛되다면 헛된 막연한 희망을 가졌던 듯하다. '이번 시험에서 어느 정도 성적이 향상됐으니까 다음번엔 더 잘 볼 수 있겠지', '내신은 상위권이 아니더라도 수능만 잘 보면 돼'에서 결국 서울 안에 있는 대학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다행이겠거니 생각했다. 대한민국 학생의 90%가 그랬듯이.
그 흔한 학원도 중학생 시절 2,3개월 다니고 그만뒀다. 공부에 흥미가 없었을뿐더러 자발적으로 등록한 학원도 아니었다. 다녔던 짧은 기간조차 학원에서 친해진 친구들과 장난치고 이야기 나누는 재미에 버틸 수 있었다. 중간고사를 잘 보고 난 후 친한 친구들과 함께 배정됐던 중위권 반에서 중상위권 반으로 강제로 옮겨지면서 미련 없이 학원을 나왔다.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공간에 친목을 목적으로 다녔으니 예견된 결과였다. 무엇보다 학원비가 너무 아까웠다. 한 달에만 40만 원 돈을 내가 스트레스받는 곳에 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 넉넉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평범한 가정이었기에 정작 학원을 등록했던 어머니 본인도 한편 부담을 내려놨던 듯하다. 사고를 치며 말썽 피우지 않고 조용히 말 잘 듣는 아이였지만 나름 고집이 강했던 아이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학원을 그만두면서 사회가 정해놓은 강제적인 교육제도와 이를 토대로 돈을 버는 회사의 꼬임에서 벗어난 승리라고 여겼다. 중학교 1학년이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요즘 학생들이야 SNS를 통해 누구보다 빠르게 트렌드를 알아채고 예전에는 어른들만 알았던 세상을 이미 꿰고 있지만 십수 년 전만 해도 학생들은 학생들만의 리그였다.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게 당연했던 시대였고 하라고 했던 목적어는 당연히 공부였다. 하지만 부모님을 한 번도 원망한 적 없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엄청난 부자는 될 수 없을지언정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은 사실이었으니까. 자식이 아무 탈 없이 남들 사는 만큼만 잘 살아가길 원하는 바람은 만국 부모 공통이니까. 정답이 있던 사회였다. 오답은 없던 시대였다. 범죄를 저지르는 정도의 탈선만 아니라면 오답은 아니라고 여겨지던, 보수적인 시대에서 현대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가르치는 이들도, 공부하라고 말하는 이들도, 공부하는 학생들도 바뀌는 시대 흐름의 중간에 서있었다. 신기하게도 오답이 없고 정답만 있는 사회로 변하는 시절이었다. 그래서 부모님도 더 헛갈렸을지 모르겠다. 본인들에게는 공부가 출세의 유일한 길이고 정답이었으니까. 그래서 세상 상관없이 정답대로만 하면 된다고 들었다.
간혹 뉴스 기사나 시중에 나온 책들을 둘러보면 어릴 적 부모님의 진보적인 교육 방식에 따라 학교도 가지 않고 자신이 원하고 잘할 수 있는 분야를 탐색했다는 글을 접할 때가 있다. 그런데 정작 내 주변에서는 본 적이 없다. 모두 나랑 똑같은 처지의 아이들 뿐이었다. 진로를 탐색하는 방법이라고 해봤자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다녀온 꽤 사는 집 아이들의 경험담뿐이었다. 대다수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학생들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만 가질 수 있던 창의력은 학창 시절 교과 과정 아래 묻혔다. 레고를 가지고 놀던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되면서 자연스레 손에서 내려놓았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놀 수 있을지 궁리하던 시간은 여러 암기과목의 내용을 외우는 시간으로 대체됐다. 수 천, 수 만 가지의 꿈을 가질 수 있었던 한 아이는 시험 성적을 잘 받아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꿈을 꿔야 하는 아이로 좁아졌다.
성인이 된 지금이야 왜 어른들이 공부, 공부했는지 이해한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지금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변함없이 통용되고 있다.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에서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초 정규 교육 과정의 역할은 물론 중요하다. 다만 미친놈들이 왜 더 나오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다양성은 구호로만 외쳐지는 밈(Meme)이 아니라 한 집단이 장기적으로 대를 이어 생존하기 위한 특성이기도 하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기계처럼 하나의 틀에 맞춰진, 좋게 말하면 산업 시대에 너무나도 효율적으로 맞춰진 청년들은 다양성과 창의성을 저 깊은 곳으로 묻는 데 10년, 다시 파내는 데 10년을 소비한다. 그럼에도 미친놈들은 결국 드러나게 된다지만 아직 극소수다. 학창 시절 나 역시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던 그들을 지금은 부러워한다. 애플(Apple Inc.)이 말했던 것처럼 세상은 미친 자들이 바꿔 왔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던 한 아이에게 사회는 제도권 교육이라는 길만 보여줬다.
여기 미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적응자들, 반항아들, 문제아들, 네모난 구멍에 끼워진 동그란 마개처럼 이 사회에 맞지 않는 사람들, 세상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 그들은 규칙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현상 유지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말을 인용할 수도 있고,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들을 찬양하거나 비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을 바꾸고 인류를 진보시키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미친 사람으로 보겠지만 우리는 천재를 발견합니다. 미친 자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 스티브 잡스, 1997
Here’s to the crazy ones, the misfits, the rebels, the troublemakers, the round pegs in the square holes… the ones who see things differently — they’re not fond of rules… You can quote them, disagree with them, glorify or vilify them, but the only thing you can’t do is ignore them because they change things… they push the human race forward, and while some may see them as the crazy ones, we see genius, because the ones who are crazy enough to think that they can change the world, are the ones who do.
— Steve Jobs,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