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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Jun 14. 2022

태어나줘서 고마워, 라는 말

영화 <브로커>를 보고 (*스포일러 그 자체)

❌스포일러⛔경보❌

(첫 줄부터 결말이 나옵니다. 결말까지 가는 과정도 자세하게 나옵니다. 스포일러를 싫어하시면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영화 <브로커>의 공식 포스터. 영화가 개봉한지 일주일 정도 되었으니 스포일러가 가득한 글을 조심스럽게 올려본다.


    “소영이는 우릴 형사한테 팔아넘길거야. 근데 그래도 돼.”라고 상현 씨가 말했던 그 장면이 마음속에 남았다. 그러면 소영이가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요, 동수가 묻는 장면도. 영화 <브로커>는 어린아이를 거래하는 브로커와 그 아이를 팔아야만 했던 소녀의 이야기다.


나는 영화를 영상 텍스트처럼 볼 때가 많다. 아름다운 영상미, 화려한 연기와 가슴 벅찬 연출, 속이 시원한 특수효과, 이런 요소보다 스토리라인 자체로 영화를 해석하는 습관이 있다. 이번 글도 <브로커>의 영화적인 상상에 대해서라기보다 그냥 하나의 이야기로 본 관점이다.


    나는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적이라는 단어는 보통 '이상적'이라는 말의 반대말처럼 쓰여서 힘들고,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단면을 잘라 보여준다. 난 힘이 들 때면 더 힘들기 싫어서, 몸도 마음도 건강할 때면 괜히 힘 빠지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 ‘현실적인’ 서사를 피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좋아하지 않았다. 원가족 간에 얽히고설킨 감정을 굳이 화면으로 또 대면하고 싶지 않았고,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아빠를 가장으로 해서 엄마와 두 명의 아이가 있는 4인 가족을 ‘정상’ 가족으로 묘사함)를 보여주는 영화는 더 싫었고, 가족의 해체가 익숙한 MZ세대로서는 이 주제가 반복되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내가 선택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친구에게 “넌 내가 선택한 가족이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나를 따뜻하게 만드는 친구가 있는데, 너가 나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친구보다 더 가까운 관계를 가족이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 애인은 아니니까. 가족이라는 단어에 나름대로의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것보다 더 적당한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가족을 식구와 비슷한 뜻으로 해석한다면 같이 살거나, 맨날 밥을 같이 먹거나, 어쨌거나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의미 아닐까. 좋건 싫건 가장 가까운 관계,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 소영, 상현, 동수 모두에게, 그리고 두 아이들에게도.


    이야기는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소영이 베이비박스 바깥에 아기를 두고 돌아서면서 시작된다. 베이비박스 시설에서 일하는 동수와 세탁소를 운영하는 상현은 어린아이를 파는 브로커다. 형사 수진은 이들의 거래 현장을 덮쳐 인신매매 현행범으로 체포하고자 한다. 잠복근무를 하던 수진은 아기를 안아 올려 베이비박스에다 넣고, 수진의 예상대로 상현과 동수는 아이를 빼돌린다. 그러나 소영은 1/40의 확률로 다시 자신의 아이찾으러 오고, 시설에 우성이가 입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찰에 신고하려는 소영을 말리며 상현과 동수는 이런저런 개소리를 꺼내놓게 되고, 소영은 “그래서 거래일이 언젠데.”하며 아이를 파는 계획에 올라탄다.


    동수는 소영이 이해가 안 된다. 자신은 39/40의 확률로 친엄마를 다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육원에서 자란 사람과 아이를 버리려는 사람 사이의 갈등상현의 중재로 풀려간다. 한편, ‘고객’이 무례해서, 혹은 경찰이 쳐놓은 그물이라는걸 알게 되면서 거래에 몇 번 허탕을 치던 중, 소영이 살인사건의 피의자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정황도 보인다. 서로 누가 누구의 뒤통수를 치려는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영화는 급격하게 흘러간다.


    이야기가 결말에 가까워지면서 이들은 다 함께 '가족여행'의 필수 코스인 놀이공원에 놀러간다. 동수가 자란 보육원에서 몰래 따라온 해진이도 함께다. 상현은 해진이를 데리고 관람차에 타고, 동수는 우성이를 안고 소영과 같은 차에 올라탄다. 상현과 해진이는 각각 아이의 부재와 아버지의 부재를 서로의 존재로 채워본다. 동수는 우리끼리, 이렇게 살면 안 될까 물어본다.  넷이서 우성이를 키우면서, 혹은 셋이서 두 아이를 키우면서. 소영이 그 순간 얼마나 "그래."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살인자의 아이로 우성이를 키우고 싶지 않았던 소영의 마음을 마주하면서, 동수는 자신의 엄마에게도 도저히 돌아올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동수는 소영의 눈을 자신의 손으로 가리고는 “너를 용서할게.”라고 말한다. 소영은 “그래도 버린 건 버린거야.”라고 말하며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려 하지만, 동수는 소영에게 화해를 전한다. 지켜진 아이들은 그렇게 세상을 용서한다.


    우성이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 밤, 상현은 우성이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라고 소영을 설득한다. 동수가 불을 끄자 소영은 침대에 누워 모든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사랑의 인사를 전한다. 상현아, 태어나줘서 고마워. 동수야, 태어나줘서 고마워. 해진아, 태어나줘서 고마워. 우성아. 태어나줘서 고마워. 해진이가 말해준다. 소영아, 태어나줘서 고마워.


    사랑하는 친구에게서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들은 날이 기억난다. 생일날이었다. 세상에 존재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처음 들었던 날의 충만하고 사무치는 순간이 가끔 생각난다. 그 말 덕분에 나는 수많은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좀 더 나은 방법, 좀 더 나은 나 자신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내가 나임을 잊지 않고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말들. 그런 말 하나, 사랑 하나가 사람을 얼마나 잘 살고 싶게 하는지 모른다.


    나는 잔혹한 순간을 포착하고 연출하기보다 그 안에서조차 일말의 인류애를 건져올려 보여주는 방식을 더 좋아한다. 세상에는 정말 끝의 끝까지 사랑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있다.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세상을 따뜻하게 보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 설령 삶의 파도에 지쳐 그 마음을 잃어버리더라도, 따뜻한 마음을 자꾸 만나다보면 그 사랑이 다시 내 안에서 차오르는걸 느끼게 된다. 소영과 동수, 상현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고객'이 아이를 정말로 사랑으로 키울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도 감독의 따뜻한 시선을 전해준다. 가해자를 엄벌하려는 시선을 조금만 거두고나면 소영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상현, 소영을 위해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체포되는 쪽을 택한 동수도 애틋하다. 나랑 우성이 키우면서 다같이 살자던 동수의 말,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그럴 수 있었을텐데, 하던 소영의 말, 그리고 마지막 고객을 만나러 가는 길에 “아직 늦지 않았어.”라던 상현의 말이 여운처럼 남았다.


    감독은 여기서 영화를 끝내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등장인물들의 다음 순간들을 다시 보여준다. 우성이는 수진과 남편의 손에 자라나고 있다. 우성이를 사려고 했던 '고객' 부부는 집행유예 상태지만 가끔 우성이를 만나 놀아준단다. 형기보다 일찍 출소한 소영은 주유소에서 성실하게 일을 하고 있다. 수진은 어느 날 소영, 동수, 어디 있는지 모를 상현, 그리고 해진과 두 부부에게까지 만나자는 연락을 남긴다. 우리 다같이 모여서 우성이의 미래에 대해 상의해보자고 하는 편지가 나레이션으로 지나간다. 소영이 달려가고, 상현의 것으로 보이는 차 백미러에 월미도에서 찍었던 가족사진이 달랑거리며 걸려있는 장면이 보인다. 그러니까, 모두가 지켜진거다. 여기 있는 모두가.


    모두가 사회적인 기준에서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지만서도, 소영과 우성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아이의 미래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자는 결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우성이도, 해진이도, 상현도, 동수도, 그리고 소영도 다 서로가 서로에 의해 지켜진거다.


    내 안의 상처가 너무 크면 내 맘 속의 어두컴컴한 동굴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애써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나 자신을 잃은 모습을 발견한다. 나를 비난하는 구덩이에 빠지면 끝도 없이 세상을 증오하고, 나를 상처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그 마음이 모이고 모여 어느새 너는 너를,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게 만든다. 소영이 스스로를 끝없이 벌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과거의 자신을 용서하게 되기를. 우성이를 지켰듯이, 어리고 의지할 곳 없었던 자기 자신의 과거를 안아줄 수 있기를. 스스로와 화해할 수 있기를.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우성이와 동수, 상현과 해진이까지 모여 귀여운 가정을 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모두가 모두를 다시  지킬 수 있기를.


    인생이 좀 트랙에서 벗어나 엉망진창이 된 것 같아도 괜찮다. 생각보다 금방 궤도 안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런 순간에조차 나를 비난하는 말들의 성을 쌓아서 스스로를 학대하지 않는게 중요하다. 우리는 모두 존재하는 것 자체로 소중하다. 소영이처럼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태어나줘서 고마워, 하고 말해보자. 정말 그래요. 당신이 외롭고 서글프지 않기를 바라요. 영화 포스터에 쓰인 것처럼, 이제 우리랑 행복해져도 됩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이 글을 쓰는 저, 그리고 이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서 당신과 함께 있어요. 당신도 당신 자신과 함께 있어주세요. 우리 모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아름답습니다. 태어나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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