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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Aug 16. 2022

잘 가시게 백수 라이프


  어쩌다보니 백수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근 1년을 유유자적하게 보냈고, 이제 끝이 났다. 가만히 있으면 오래도록 다닐 회사를 “MZ 답게” 걷어차고 나와 추위와 더위, 장마와 집안의 눈치를 넘겨가며 알차게 밍기적거렸다. 회사를 오래 다녔던지라 퇴사하면 심심할까 싶었는데 웬걸, 퇴직 신청서에 쓰인 날짜의 다음 날이 되니 나는 내가 회사를 다녔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아주 신난 마음으로 시한부 자유를 받아들였다. 방학을 맞은 아이 같은 상태였다. 이리 뒹굴고, 저 카페에서 죽치고 있었다. 코로나19 중이라 여행도 안 갔다. 그냥 밥을 축내고, 잠을 자고, 눈치가 보이면 슬쩍 나가서 밥을 먹고, 또 카페에서 놀다가 집에 가고 그랬다. 아, 이런 자유가 종말을 맞이하다니!


  사실 그저 놀려고 회사를 때려치운 것은 아니었다. 살다보니 나 혼자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저런 것을 실험해보고자 했다. 그런데 막상 놀기 시작하니까 그저 늘어졌다. 이왕 회사를 관둔 김에 좀 놀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두 손 들고 항복했다.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나는 일하려고 태어난 게 아닌데. 내가 나의 자유를 존중할 줄 알아야지!






  노느라 묘하게 바빴다. 원래 직장인보다 백수가 더 바쁜 법이다. 회사에 지쳐 사직서를 낸 것은 맞지만,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데 못 했던 것들이 잔뜩 있었다. 코로나 중이라 해외여행을 가기 어려우니 그냥 일상적인 것들을 하기로 했다. 글을 쓰고, 운동을 했다. 직업 글쓰기인처럼 글을 쓰려고 노력해봤고, 생활체육인처럼 빡시게 운동을 뛰었다. 월소득이 뚝 끊기니까 슬슬 불안해져서, 간단한 소일거리도 했다. 일단 글을 쓰는 것은 힘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연필을 놓고 있었으니까. 노트북을 켜놓고 덩그러니 앉아만 있었던 시간이 한참이었다. 머릿속에서 뭐가 나오지도 않고, 머리에 뭔가 집어넣어지지도 않을 때는 벌떡 일어나 운동을 하러 갔다. 체육관은 다 집에서 편도 1시간 이상 거리로 잡아뒀다. 길 건너면 헬스장인데 무슨 일이냐 싶지만, 또 백수에게는 애매하게 남는 시간이 고통이 되는 법. 한 주에 4번 멀리 운동을 하러 가는 과정만으로 시간을 많이 해치웠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당당히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아도 되도록, 나에게 포상의 시간을 마련한 겸이었다.


  나만의 업무-휴식 루틴을 만들어보겠다는 계획도 실천해봤다. 나 혼자 프리랜서로 살아갈 수 있을지를 실험하는 과정이랄까. 나는 대부분의 한국 회사 스타일, 그러니까 위에서 시키는대로 작업을 하다가 또 위에서 엎으라면 엎어야 하는 방식과 전혀 안 맞았다. 그런데 또 나 혼자서 모든 일을 똑 부러지게 하진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홀로 앉아서 듬직하게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은 어렵더라고. 초반 두어 달 간은 노트북만 켜놓고 커서가 깜빡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가수면 상태였다. 자기혐오와 좌절감이 슬쩍 왔다 갔다. 생각보다 헤매는 기간이 길어지자 글을 쓰는 친구들이 팁을 줬다. 혼자 마감일을 만들어두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그냥 수많은 공모전에 너를 맞추라고 했다. 그 말이 맞았다. 나만의 마감일은 두세 번 클릭하기만 하면 바뀌었다. 하도 일정을 바꾸다보니 나중엔 양심의 가책도 없어졌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나는 관리감독이 필요한 케이스구나. 내 관리감독은 내가 할 수 없구나. 이걸 알아낸 것만 해도 나름의 소득이었다고 믿는다.






  그래도 몇 달 고군분투하면서 나에게 맞는 루틴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6개월은 걸린 것 같지만, 나름의 효과도 있었다. 유튜브에서 추천하는, 혹은 친구들이 보고 겪고 말해준 백수 루틴을 다양하게 도전해봤다. 휴식과 관련된 워크숍도 들었다. 일단 지금의 내가 도달한 결론은 아침에 집중적으로 일하고, 오후엔 운동하고 밥 먹고 탱자탱자 노는 거다. 이전 회사에서 주 55시간씩 일하다 보니 이젠 정말 일을 오래 하기가 싫었다. 내가 일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잖아. 그래서 일과 관련한 책도 많이 읽었다. 몰입, 4시간만, 적게 일하고, 이런 키워드가 들어간 책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몰입해서 작업하면 오랫동안 책상 앞에 앉아있지 않아도 된다는 나만의 결론을 도출했다. 루틴을 몇 가지로 실험했다. 나는 아침에 머리가 가장 쌩쌩 돌아가는 타입인지라 오전에 서너 시간 작업을 하는 패턴이 딱이었다. 막상 백수 기간엔 늦잠을 자거나 아침부터 논다고 잘 실천하지 못했지만. 할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나면 놀다가 요가나 운동을 좀 했다. 그러고 나면 책을 읽거나 교양 강의를 듣고, 체육관에 가러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생각보다 삶이 잘 유지됐다. 거창하게 말하면 나는 쉬는 동안 내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사람인지, 어떤 삶을 즐기는지를 겪어본 모양이다.


  최근 두어 달에는 책도 많이 읽었다. 정세랑, 김초엽 작가의 책들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을 왕창 읽었고, 가끔은 주식이나 재무 관련 서적도 재밌게 읽었다. (이게 재밌다는 게 ‘경제적’ 어른이 되었다는 뜻인가 보다.) 가족이 큰 수술을 하는 동안 집에서 병원까지 긴 거리를 오가면서 책을 탐닉했다. 어둡고 캄캄한 마음을 다 글로 풀어낼 수는 없어서 작가들이 아름답게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에 나를 던졌다. 활자에 달려들어 이렇게 숨 가쁘게 읽어간 것도 오랜만이다. 또 다른 인풋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뭘 했나 싶어서 스케줄러를 열어보니, 퇴사 직후에는 운전면허를 땄다. 남들이 다 19살 느지막이 하는 그걸 이제라도 했다. 영화도 잔뜩 봤다. 코로나로 새로운 영화가 별로 나오지 않는 틈을 타서 재개봉했던 옛 영화들을 봤다. 전시회도 많이 봤다. 원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찬스라고 생각해서 달에 두세 번은 함께 외출을 했다. 백수 친구들도 만나고,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도 만났다. 꼼짝없는 대학원생도 가끔 만나 위로하고, 결혼식과 장례식에도 몇 번 갔다. 회사를 들어갔으니, 면접도 봤었지. 와, 나 바빴네. 무작정 쉬고 싶어서 퇴사한 게 아니긴 했지만, 노는 방법도 가지각색으로 바빴네. 역시나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쉬는 것이 제일 어렵다.






  그렇게 여차저차 다시 회사원이 되었다. 새로 시작한 직업은 잘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지는 않았던 쪽이다. 재능은 있는 것 같은데, 굳이 내키지는 않는 것.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교집합은 맞는데, 계속 '굳이...?'라는 질문이 따라다니는 직업. 언제나의 차선책. 그래도 한 번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토록 많은 직업을 거쳐왔음에야 (난 유독 또래와 비교해서 직업군을 다양하게 가진 편이다. 회사도 꽤 여러 개 다녔고. 그러니까 짧게, 여러 개 다녔다.) 잘하고, 재밌을 것 같은 건 다 해봐야 맞지 않을까. 직업적 방황을 이토록 겪었는데, ‘진짜 내 일’을 하기 전에 애매한 선택지를 남기지 않고 다 해봐야 할 것 같아. 커리어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마당에야 못할 게 뭐가 있겠냐 싶다.


  세상 모든 백수들이 그렇듯 일을 시작함과 동시에 사직서를 마음에 품었다. 나는 MZ 세대니까 이 회사에 65살까지 다닐 순 없잖아. 언제까지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용기와 똘끼와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있어 다행이다. 잘 놀았다. 또 몇 년, 여차저차 재밌게 다녀야지. 또 과몰입해서 주 60시간씩 일하지만 말아야지. 백수 라이프, 안녕! 진짜 '내 일'을 하게 되면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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