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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Oct 26. 2022

안녕

작별인사

**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는 글입니다. **



친구들을 많이 떠나보냈다. 친구이기도 하고, 지인의 범주에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살면서 딱 한 번 이야기해봤던 누군가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가 서로만 믿고 의지하던 시절, 우리에게는 서로밖에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너무나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의 터널을 지나면서, 또 다른 터널에 스스로 갇혀버린 친구를 꺼내려 발버둥 치던 날. 그런 날들에는 얼굴 한 번 본 사이라도 곧 ‘우리’가 되고, ‘내’가 되었다.


항상 이맘때, 슬슬 추워지는 계절에 떠나간 친구들 생각을 한다. 사실 이건 과장된 말이고, 장례식 날짜는 다 달랐다. 뜻하지 않게 딱 한 해를 사이에 두고 두 번 인사를 하긴 했다. 그 둘이는 서로 모르는 사이일 텐데, 내 스케줄러에는 ‘ㅇㅇ과 ㅁㅁ 기일’이라고 같이 표시되어 있다. 내 친구는 곧 네 친구이기도 하잖아. 혹시 너희, 거기서 만났니? 인사는 나눴을까. 이제는 각자 새로운 삶으로 접어들었을까.


비슷한 지인들과 비슷한 장례식을 가졌다. 너무 어린 죽음에는 장례식이 없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라서 길거리를 헤맸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도 있었고, 그렇지 않았던 사고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방황했다. 너무 젊은 날부터 동갑내기 또래들, 동생들의 죽음을 마음 안에 쌓았다. 아니, 아무리 쌓아도 쌓이지 않았다. 바닥이 훤히 뚫린 구덩이 같았어. 우리 다음엔 좋은 일로 만나자! 하고 외쳐놓고는 한 해에 한 번씩, 소리 내어 울 수 없는 곳에서 만났다. 다음 장례식은 누굴까, 그 말을 애써 눌러 담으면서 눈물을 참고 먹었다.


죽음을 수용하는 과정에는 다섯 단계*가 있다던데, 우리는 고작 부정과 분노 사이를 떠돌았다.  과연 이것이 ‘선택’인가를 두고 스스로와도 타협을 볼 수가 없었다. 마음 편하게 잘 살았으면 이런 ‘선택’이 있었겠냐고, 누가 이 아이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도 그 자를 용서하면 안 되겠지? 얜 우리가 뭘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까? 우리는 모든 것을 과거로 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아니, 나부터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네들의 삶과 죽음에 나는 끼어있지 않다는 게 분명해 보였지만 그래, 그때는 내 탓을 하고 싶었다. 그날이 내가 널 보는 마지막인 것을 알았으면 편의점 커피 말고 따뜻한 라떼라도 사줄걸. 내가 문자라도 할걸. 너랑 낮술을 마실 때 넌 참 좋은 사람이라고 꼭 이야기해줄걸. 내가… 내가 너의 우울을 조금만 더 짊어져볼걸. 죽고 없는 친구에게 수없이 말을 걸었다. 내가 그래서 미웠니? 나 때문에 슬펐지.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미안해.


살아있는 친구도 천천히 죽어갔다. 내가 좀 더 잘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모두의 정신 속에서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하나라도 더 살려보자는 마음이었다. 얘는 절대 안 돼. 얘만큼은 절대 안 돼. 제발 나랑 같이 살아보자고, 우리 조금만 더 지나 보자고 눈물로 발목을 붙잡았다. 다짜고짜 그럼 안 된다고 했다. 지나갈 거라고도 했다. 이게 지나갈까? 이것도 지나갈까, 현아. 너의 서글픈 무표정이 아직도 마음에 떠올라. 우리는 모두 자살 유가족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지나갔다.  다들 치료와 상담을 대충 마무리하고 이 세상에 발을 붙였다. 이젠 과거인 것 같아. 처음에는 가슴 아픈 주제를 피하려고 친구 얘기를 안 했는데, 이제는 다들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다. 걔 그때 머리 잘랐을 때 진짜 웃겼잖아. 아니, 술 먹고 그냥 잤다가 렌즈가 눈에 붙어서 수술받았던 건 기억나? 진짜 바보 아니냐고. 아, 그때 걔랑 여기서 볶음밥 맨날 비벼먹었는데. 와, 진짜 옛날이다. 완전 ‘라떼는’ 아니냐? 뭐 어때, 걔도 이제 베이비 아니겠어? 놀만큼 놀고 환생했겠지. 끽해봐야 네다섯 살 아니겠냐. 헐, 미운 다섯 살이네. 엄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걔 진짜 커서 효도해야 한다. 그 성질머리 그대로잖아? 진짜 안 되는 거야, 그럼. 극락엔 못 가겠다, 몇 번 환생 더 하겠다.


한동안 이 계절이 고통이었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영원히 스물몇 살인 사람들이 주변을 맴돌았다. 이 도시의 집값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비쌌는지, 다들 멀리 다른 곳에 잠들었지만 죽음의 무게는 끊임없이 나를 쫓아왔다. 나도 행복해도 될까, 나도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 언젠가 나도 이걸 과거로 두고 나아갈 수 있을까. 너의 빈자리를 진심으로 애도하고, 너희들의 죽음을 수용하게 될까.


그런 생각을 이제 안 한다. 아주 가끔씩만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생각하게 됐다. 몇 번 몰래 전화해봤던 전화번호가 없어지고, SNS 프로필도 없어지는 동안 나도 괜찮아졌다. 추모 계정으로 바뀐 SNS 한 군데에서만 가끔 이름을 검색해보다가 거기도 탈퇴했다. 다정한 사진들만 몇 장 저장하고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수많은 사진 아래, 오줌 필터라고 부르던 누런 필터에 낀 우리의 청춘.


이제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라는 말을 조금은 받아들이지 않았나 싶어. 우리는 영원히 살지 않고,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는 존재고, 그전까지 세상을 따뜻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건가 봐. 네가 경험한 이 세상이 별로 다정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미안해. 그래도 있잖아, 그래서 내가 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더, 좀 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져.  다른 사람의 테두리를 존중하면서도 또 의지가 되는 사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아. 너희에게도 그런 친구이고 싶었어. 그런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면 된다는 걸 알겠어. 나에게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난로 같은, 촛불 같은 사람. 사랑.


있잖아. 잘 지내? 꼭 말하고 싶었는데, 사랑해. 사랑한다.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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