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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Feb 16. 2023

가장 의외로운 순간

베이비 학원교사의 6개월짜리 소감문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학교는 아니고, 아주 바쁜 학원에서 일한다. 매일같이 13-14세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산다. 스스로 가장 잘 기능할 수 있는 계열의 업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해봐도 그렇다. 여태까지 해왔던 일들보다 흥미를 끄는 구석이 더 많다. 일이 바쁘고 힘든 것과 별개로, 하루하루 아이들과 부대끼는 과정은 즐겁다. 물론 아직 초반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친구들에게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내가 아직 초짜라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라고 말문을 연다. 한 6개월만 더 지나도 "아오, 짜증 나!"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변하는 과정을 보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 싶다. 브런치에서도 앞으로 일 년 정도는 아이들에 대해 실컷 이야기할 것 같다.



가장 의외로운 지점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싶다. 아이들은 투명하다. 정말 그렇다. 나는 초등학생 또래의 아이들을 볼 일이 전혀 없었다. 교직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상 속에서도 중고등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보육에는 정말 관심이 없었으니까. 출산과 양육에 대한 생각 모두 0에 수렴하다 보니 생활 반경에 어린이가 들어올 일이 없었다. 몇 달에 몇 시간씩 친척 아기들을 보는 정도였다. 그래서 이 나이대가 그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욕망이 가득한 나이인 줄 몰랐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말한다. 선생님한테 말을 안 하더라도 핸드폰으로 친구와 떠들고, 앞자리 옆자리 친구와 떠든다. 선생님이 조용히 하라고 말하면 그냥 자기들끼리 온갖 수신호와 낙서로 떠든다. 자리를 떼어놓아도 어떻게든 수업시간에 열정적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들어보면 그냥 "야!", "뭐!", "어쩌라고!", "지가 먼저 했으면서!" 뭐 그런 내용이다. 귀여워서 뭐라고 안 하고 두고 보고 있으면 눈치를 살살 보면서 끝까지 떠드는 게, 아주 깜찍하다.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이 스멀스멀 교탁으로 다가온다. 보드마카를 꺼내 들고 선생님을 괴상하게 그리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가끔은 서로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그림들을 그리고, 거기에 서로의 이름을 적어둔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날 소환한다. 여기 괴물은 선생님, 여기 괴물은 누구, 여기 괴물은 또 누구. 자기들끼리 재밌는지 낄낄낄 웃는다. 선생님이 어깨 너머로 몇 마디 대충 대답을 하면 슬슬 선생님 주변을 에워싼다. "선생님 있잖아요.", "선생님 근데요.", "제가 지난번에 말했잖아요.", "아니, 내가 먼저 말했거든?"의 반복이다.



그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것. 사랑해 주세요, 관심을 보여주세요,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제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제가 입으로 이상한 방귀 소리를 낼 땐 저한테 빨리 관심을 가져달란 뜻이에요. 일 분이라도 제게서 관심이 멀어지는 게 싫어요. 그래도 꾸중은 미워요. 잘한다, 잘한다 칭찬만 해주세요. 단어시험 몇 점인지 빨리 채점해 주세요. 저 오늘도 백 점이니까, 어서 빨리 칭찬해 주세요. 사랑해 주세요. 사랑해 주세요.



살면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어른들에게 익숙해졌다. 그러다 보니 통통한 이마 안쪽이 유리처럼 비쳐 보이는 아이들이 낯설었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과하게 생각하나?'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일까?"라는 질문에 "칭찬받을 때,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을 때"라고 써둔 것을 보니 약간의 확신이 생겼다. 매일같이 학원으로 밀려나는 개구리밥들, 그 속에서도 누군가의 사랑과 인정을 찾아 헤매는 알알이 아이들. 타인의 평가나 외적인 상과 벌이 너의 인생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가끔 슬쩍 그런 이야기를 흘린다. 그렇지만, 그와 별개로 가정 밖으로 슬슬 자라 나오는 아이들에게 타인의 사랑과 관심, 인정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사랑받고 싶다고 말해봤을까. 안아주세요, 칭찬해 주세요,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언제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봤을까. 제가 징징거려도 10분만 들어주세요. 속상한 일이 있었어요, 저 좀 안아주세요. 뽀뽀도 해주시고, 둥개둥개도 해주세요. 어여쁘다, 귀엽다, 귀하다 쓰다듬어주세요. 저 너무 신나요, 제 이야기 좀 들어봐 주세요. 갈비뼈 사이가 딱 들어맞도록 꽉 안아주세요. 저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세요. 제 마음을 안아주세요.



아이들이 안기면 눈치껏 나도 폭 안긴다. 둘 다 서로에게 안겨서 가끔 웃기다. 어른의 마음도 쪼잔하고 슬퍼서 가끔 이렇게 아이들이 안아주면 발끝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 든다. 일주일에 두 시간 삼십 분, 아이들의 인생에서 잠시 스쳐가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작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어 다행이다. 아이들이 필요한 것을 조금이라도 채워줄 수 있는 어른이어서 감사하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만큼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어서 행복하다. 사랑받고 싶은 어른에게 가끔 세상이 너무 크고 무겁지만, 그래도 따뜻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사람이라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그 마음 그대로 나한테도 소중하다, 귀하다 말해줘야겠다. 자존심을 내세운다고 내가 말하지 못했던 것들. 다정하게 말하고, 당신도 나에게 다정했으면 좋겠다고 물어볼 수 있는 마음. 투명한 아이들을 안아주듯 오늘은 작고 무거운 내 마음을 안아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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