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관에서 벌어지는 한 편의 연극
※ 들어가기 전
이 글은 어떠한 정치적 색채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점 참고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원식 원내대표는 국회 정론관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과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선거연령 하한은 더는 늦출 수 없는 사안이라며…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국회를 출입한다. 국회의사당 본당 1층에는 정론관(正論館)이 있다.
정론관은 국회 출입기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러니까 기자실이다. 기자들이 워낙 많으니, 아예 한쪽 복도를 전부 떼서 정론관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버렸다. 청와대 기자실이지만 청와대와 완전 독립된 춘추관하고 비슷한 개념이라 보면 된다. 물론 국회 본당 안에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춘추관보다야 조금 덜 폐쇄적이다.
정론관은 다시 두 곳으로 나누어진다.
1. 공식 브리핑과 기자회견이 벌어지는 브리핑룸(흔히 이 곳을 정론관이라 부른다)
2. 기자들이 매체별로 모여앉은, 칸막이쳐진 공간(각 회사 부스라고 부른다)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을 위해 마련된 자리는 없다. 그들이 정론관을 온다면 그건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국회의 중심에 있는 국회의원들도 정론관이란 특수한 공간만큼은 주인(主)이 아닌 손님(客)이 되어 온다.
그리고 보통 손님은 정론관에서 한 편의 연극을 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일요일 국회는 가끔 시끄럽다. 정당 지도부가 일부러 기자회견을 잡기도 한다. 월요일 새벽에 나갈 조간신문 때문이다.
아무리 인터넷이 잘 나간다 해도 한국 언론은 여전히 조간신문 발행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조간신문에 실리고 싶은 정치인들은 일부러 일요일이라는 타이밍을 잡아 각종 기자회견을 연다.
18년 3월 11일 국회의 유일한 발생사안은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이자 충남지사 예비후보의 기자회견이었다. 참고로 정론관 예약은 현역 국회의원 명의로만 가능하다. 박수현 후보는 현직이 아니다. 민주당의 친한 국회의원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오전 10시 30분에 예정된 그의 기자회견을 챙기기 위해 부스에서 정론관(브리핑룸)으로 이동했다.
안희정이 역대급이지만 박수현도 이야깃거리가 많다. 충남지사 당선 가능성이 높고, 안희정의 친구이자 문재인의 첫 대변인이었다. 이런 사람이 불륜설에 휘말렸다. 기자들이 몰려왔다.
박수현 후보는 정확히 10시 24분에 브리핑룸으로 들어왔다. 활짝 웃고 있었다. "정론관도 오랜만에 오네요" 19대 국회의원 당시 당 대변인을 맡았던 박 후보는 일일히 웃으며 모인 기자들과 악수했다. "그새 못 보던 기자들이 많아졌어" "나는 그냥 인사하러 온 건데 많이 오셨네요"
박 후보는 약 8분동안 기자들과 악수를 한 후에야 무대에 섰다. 8분동안 박 후보가 만난 취재진이 50명을 넘었다. 박 후보가 취재진을 기억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대에 선 박수현 후보는 미리 준비한 보도자료를 읽어나갔다. 보좌진이 돌아다니면서 박 후보가 읽는 보도자료를 기자들에게 제공했다.
글은 정제되어 있다. 하지만 글을 읽는 박 후보는 중간중간에 격정적인 표현을 섞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거짓이고, 완벽하게 정반대의 새빨간 거짓말이다, 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원고에 없는 문장을 읽는 안 후보는 처음으로, 카메라를 정면 응시했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힘을 주어 발음했지만, 분노는 들어있지 않았다. 대변인을 오래 한 경험이 그대로 녹아있는 화술이었다.
관음증적이고 선동적인, 그리고 일방적인 허위 날조 비방입니다. 이 같은 새빨간 거짓말에 저의 전처까지 동원된 것은 참으로 개인으로써는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입니다.
아까에 없던 분노가 추가됐다. 힘을 주는 걸 넘어 감정을 한가득 담았다.
한때 사랑했던 아내였습니다. 개인사를 허위조작하는 네거티브에 굳이 대응하고 싶지 않았고 전처의 치부를 들어내면서까지 진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울먹였다. 울진 않았지만,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말하는 속도가 느려지더니, 잠시 멈추고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 순간 카메라 세례가 쏟아졌다. 박 후보는 약 4초 정도 말을 멈추고 다시 회견문으로 눈을 돌렸다.
제가 정치를 선택했던 의미, 발달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던 내 아이가 죽었던, 그리고 내 아이와 약속했던 저의 약속, 그게 박수현의 길입니다.
아이를 언급할 때는 아까의 울먹이던 감정이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처음과는 다른 결연함이 엿보였다. 아이 이야기에서도 박 후보는 기자회견문에 없던 말을 조금 추가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온브리핑이 끝났다. 박수현 후보는 90도로 인사한 후 정론관 브리핑룸을 나왔다.
기자들은 따라 나갔다. 자료가 주어지는 온브리핑보다도 중요한 백브리핑이 남아있었다.
기자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워딩을 받아칠 준비를 했다. 적당히 센스 있는 시간적 여유를 두고 박 후보가 복도로 나왔다.
무대에서 내려온 박 후보는 다시 여유를 찾았다. 영상취재 및 카메라 기자들이 준비를 하는 동안 박 후보는 변호사와 이야기를 하며 물을 마셨다. 종이컵을 받아든 박 후보는 웃었다. "내가 이렇게 물 마시면 꼭 물 마시는 박수현 후보 해서 사진 찍히더라고." 그 말에 기자들도 살짝 웃었다. 사실, 박 후보의 말은 정확히 맞앗다. 이날 박 후보를 찍은 사진의 상당수가 박 후보의 물 마시는 사진이었다.
보좌진에게 물컵을 전달한 박 후보는 모여앉은 기자들을 돌아봤다. "자, 이제 시작해도 되나요?"
"네"라는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침묵 자체가 긍정이었다. 그걸 잘 아는 박 후보는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딱딱한 (온)브리핑과 달리 백브리핑은 자유롭다. 백브리핑에서는 취재기자가 질문을 먼저 한다. 취재원은 답변을 내놓는다.
백브리핑의 형식은 출입처 문화마다 다르다.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조건을 거는 경우도 많다. 오프더레코드(=취재원의 말을 기사화하지 않는 전제, 줄여서 오프)를 거는 경우도 있고, 오프는 아니지만 카메라 없이 취재기자만 와달라는 부탁도 있다.
국회 정론관 백브리핑 문화는 가장 자유로운 축에 속한다. 중요한 기자회견일 경우 카메라도 있고 모든 워딩을 기사화할 수 있다.
박수현 후보는 추가적인 조건을 걸지 않고 백브리핑을 시작했다. 아까보단 자유로웠지만 웃는 얼굴은 확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전처와 먼저 간 아이를 언급할 때 박 후보는 살짝 울먹였다.
백브리핑에서도 여러 내용이 나왔다. 기자들은 온브리핑과 백브리핑을 종합해 기사를 썼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백브리핑 하는 박 후보의 캐릭터(identity)와 온브리핑에서의 캐릭터는 확실히 같았다. 그리고 중간 휴식 시간의 박 후보는 아주 조금, 다른 사람 같았다. 마치 무대 위와 무대 밖의 배우처럼.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2018년 3월 11일, 박 후보라는 배우가 정론관이란 무대에서 보여준 능숙한 연기가 참 흥미로웠다.
3월 11일 전까진 박수현 후보와의 접점이 없었다. 당연히 박 후보 개인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선입견도 없다.
편견 없는 상태에서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인다. 박 후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박 후보의 증거는 자세했다. 충분히 신빙성 있는 내용이었다. 법리적인 판단과 구체적인 증거싸움으로 가면 어떻게 될지 판단할 순 없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박수현 후보가 적어도 권력형 성문제를 논의하는 미투 운동에 딸려 끌려나올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박 후보가 능숙한 연기를 보여줬다는 생각과, 박 후보가 왠지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