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님, 전화 좀 받아주세요

서로에게 일방적인 취재방식, 전화 마와리에 대한 넋두리

by 밍경 emb
드라마 '피노키오'

Intro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


기자라는 직업을 참 잘 표현하는 문장이다. 이 직업은


도꼬다이를 해도(=단독 기사를 써도)

물먹어도(=낙종. 타사에서 단독/특종을 보도했을 때)

반까이를 해도(=낙종 후 단독 보도로 만회하는 것)

조지거나(=비판 기사를 쓰는 것)

쪼찡(=칭찬, 어감 안 좋은 말로 '빨아주는' 기사를 쓰는 것)을 해도


저녁이 되고 기사가 송고되면 모든 상황이 끝난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그러다보니 이 직업은 출근 직후가 가장 바쁘다.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노트북을 꺼내 일을 시작한다. 출근 직후 평기자가 해야 할 일은 크게 잡아 세 가지다(회사마다 미묘한 차이는 있다):


1. 일정 정리 - 오늘 하루 출입처에 있을 공식/비공식 일정을 양식에 맞춰 정리해 올린다. 주로 출입처 말진이 담당한다.

2. 조간 체크 - 조간신문을 훑어보며 어제 상황을 정리한다. 출입처 말진 기자는 출입처 관련 타사 단독 기사를 체크한 후 별도로 메모(=일종의 정리된 양식. 쪽지 형식이라 메모라고들 부른다)를 만들어 보고한다.

3. 발제 - 일정 및 전날 취재 내용을 기반으로 오늘 써야 하는 리포트의 가제와 야마(=기사의 주제,방향), 대략적인 기사 형식을 메모로 정리해 보고한다.


세 과정의 마감 시간은 내 회사 기준 출근 후 40분까지다. 말이 쉽지 주요 조간 신문만 10부다. 제목만 훑어봐도 시간이 엄청 소요된다.

발제도 쉽지 않다. 오늘 하루 출입처의 흐름, 취재 방향이 발제를 통해 정리된다. 내가 오늘 기사를 쓰느냐 마느냐는 가르마를 타주는(=사안의 중요도,기사의 경중, 타 부서와의 연계성 등을 고려해 적절한 지시를 내리는) 부장급의 발제 채택 여부에 따라 다르지만 말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되긴 된다. 다만 국회를 출입하는 나는 발제를 마친 후 매일 비슷한 시간에 해야 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이름만 들어도 진절머리나게 싫은 4. 전화 마와리다.



보기조차 고통스러운 부재중 전화 표시

전화 마와리: 누구 한 놈은 받겠지


마와리는 '돌아다닌다'는 말의 은어다. (관련 은어 설명 참고: https://brunch.co.kr/@emblem0403/4) 원래 경찰서를 출입하는 사건 기자들이 경찰서를 빙빙 돌아다니는데서 쓰는 용어다. 그러나 용어의 쓰임이 확대되어서, 기자가 출입처를 기웃거리며 사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닐 때 '마와리 돈다'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전화 마와리는 간단히 말해 빙빙 돌아다니는 그 일을 전화로 하는거다. 국회를 포함한 정치부가 특히나 많이 하는 취재방식이다. 발제를 마치고 각 당의 오전 회의(보통 9시)가 열리기 전까지, 그날 사안 및 발제와 관련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한다. 물론 휴대전화로. 취재원이 전화를 받으면 현안 관련한 간단한 상황과 비공식 일정, 그날 오전 회의의 의제와 예상 전망, 분위기 등을 물어본다.


대부분 깊이 있는 취재까진 못 하고 간단간단한 상황만 체크한다. 그렇지만 한 출입처당 서너 명에게 전화를 돌리면 조각그림 맞추듯 하루의 윤곽이 보인다. 지도가 있으면 길을 찾기 쉽다. 전화 마와리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 직업군이 오늘 하루를 헤쳐나갈 지도를 찾는 작업......이라고 하지만 엄청난 허점이 있다.


취재원이 전화를 안 받으면 아무 것도 못 한다.





너는 받고 싶을 때 받고


그리고 상당수의 취재원은 전화 마와리가 필요한 아침시간에 전화를 안 받는다. 가장 취재가 쉽다는 국회조차도 이 모양인데 다른 출입처는 오죽할까.


그래도 받는 사람이 있을 때까지 전화를 돌린다. 보통 오전 9시 전까지 최소 5명이 넘는 국회의원/보좌진/관련자에게 전화를 건다. 열 통을 걸었는데 아무도 전화를 안 받을 때도 있다. 이런 날은 기운이 쭉 빠진다.


취재원은 받고 싶을 때만 전화를 받는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상황에서는 전화를 꺼린다. 한편으론 받고 싶은 매체/기자 전화만 받기도 한다. 요즘 분위기를 반영하면 무언가를 폭로하고 싶은 취재원은 일면식 없는 사이라도 J 매체 소속 기자의 전화를 목 빠지게 기다릴 테다. 요약하면, 취재원은 일방적으로 누구에게 취재당할지를 선택한다.


그럼 취재랑 시혜(施惠)랑 다를 게 먼데?


전화 마와리를 돌 때마다 이 생각이 자꾸 든다. 어느 정도의 친밀감을 쌓아둔 취재원이라 해도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 기자의 전화를 안 받아버린다. 전화를 다시 받기 시작할 때는 기자의 입을 통해 무언가 해명하고 싶을 때다. 그러니까 전화마와리 취재방식에서 취재원은 갑이 되고 취재자는 을이 된다.


아침마다 전화 열 통을 돌리다 보면 전화를 받아주는 취재원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 고마움을 느끼는 내 모습이 싫다. 취재가 아니라 종속된 느낌. 전화마와리에 진절머리치는 첫 번째 이유다.




나는 하고 싶을 때 하고


그래도 매일 전화 마와리를 돌린다. 일단 전통적인 취재방식을 고수하는 데스크 급이 전화마와리를 좋아한다.


사내 높으신 분들은 전화를 안 받는다는 전제를 잘 이해하지 못 한다. 얼굴 알고 매체 알고 번호 저장하면 안 받을 이유가 뭐냐고 말씀하신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높으신 분들이야 조간,석간, 방송이 열 개 남짓일때 말진 생활을 하셨으니 그런 것 아니냐고 항변하고 싶지만... 사실 나도 전화 마와리의 대안을 못 찾겠다. 그러니 싫어도 돌린다.


보통 오전 7시 30분에서부터 8시 30분까지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다. 급하게 팩트 체크를 해야 해 새벽 6시대에 전화를 돌린 적도 있었다. 일단 전화를 안 받아도 두세 번 정도는 계속 건다. 조간 체크 등 다른 일을 하면서 BGM마냥 통화 연결음을 듣는다. 이제 몇 국회의원의 컬러링은 따라 부르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것도 상대방에게 못 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화 마와리를 싫어 하는 두 번째 이유다. 검사마냥 영장청구권을 받아든 것도 아닌데 취재라는 마법의 단어로 상대방의 전화를 새벽 댓바람부터 울려댄다.


사안이 없어도 전화를 돌린다. 어쨌든 오늘 하루를 짜맞출 지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 전화 마와리는 매일 아침마다 하는, 정형화된 일상 중 하나다. 취재원은 별로 말 할 것도 없고 말 해줄 것도 없는 조용한 날에도 기자들의 전화에 시달려야 한다.


전화 마와리를 도는 기자가 나 한 명도 아니다. 당 지도부나 특정 사안 관련자들은 매일 새벽에만 적어도 20명이 넘는 기자에게 전화벨 울림을 당한다. 그것도 비슷비슷한 질문으로.


약 두 달 전, 내 이름을 아는 취재원(국회의원)이 지나가듯 한탄을 늘어놓았다.

"내가 예전에 아침 8시엔가?
따로 일정이 없어서 조금 늦게 일어났는데 말야.
부재중 전화 쉰 두 통이 찍혀있던 때가 있었어. 어휴"



관습은, 많은 경우 비효율적


너는 받고 싶을 때 전화를 받고 나는 하고 싶을 때 전화를 한다. 이 문장이 전화마와리의 본질인데, 곱씹을수록 참 폭력적이다.

하지만 어찌 됐든 너는 전화를 받는다. 나는 전화를 한다. 서로가 전화마와리라는 취재방식을 이해하기 때문에 시스템은 굴러간다.


한국 저널리즘은 도제식 교육으로 명맥을 이어간다. 기사의 형식과 방법은 물론 취재방식도 선배들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전화 마와리라는 관습도 그렇게 최소 몇십년간 이어져 내려왔다. 앞으로도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얻는 것에 비해 소모되는 에너지가 지나치게 크다. 그러니까 비효율적이다. 나는 이 생각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다. 사람 정신까지 깎아먹는 전화마와리를 통해 나는 오늘의 주요 의제를 고작 몇 시간 빨리 안다. 서울시장 후보가 누구인지 하루 정도 빨리 인지한다. 그게 전부다.


누군가는 전화 마와리로 대략적인 얼개를 그리면 미리 단독을 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서울시장 후보나 유명인사 입당 같은 정보들 말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것조차도 쓸데없다 생각한다. 어차피 하루 후에 당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할 내용이었다. 하루 전에 알았다고 무슨 단독 글자를 붙여서 내보내나. 아무에게도 도움되지 않는 소모적인 정보전달이자 무의미한 시간싸움이다.


전화 마와리를 돌릴 에너지로 기자 개인이 하고 싶은 특정 분야의 취재를 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직업에서, 적어도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장기적이고 깊이 있는 취재를 할 수 있는 취재 환경을 마련해주면 효율적이고 퀄리티 있는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다만 관습은 관습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용해 스스로를 방어한다. 이쪽 세상에는 전화 마와리를 신봉하고 그것이야말로 취재의 기본이라 생각하는 고루한 분들이 꽤 많다. 게다가 도제식 문화가 전제되는 업계다 보니 전화 마와리를 없애긴 정말 어렵다.


그 어렵다는 걸 인지하고서라도 문제의식과 대안을 고민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고 또 연차가 쌓이면 이쪽 업계의 문화도 느리지만 아주 조금씩,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과거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바뀌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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