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밍경 emb Feb 06. 2021

나는 매일 잃으며 꽃을 피운다

언니네 이발관-의외의 사실


서른두 살 변리사라는 안경 낀 남자가 불현듯 취미가 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살짝 당황했다. 오랜만에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 너무 정석적인 질문을 마주해서가 첫 번째였고, 그 질문에는 사실 무진의 텁텁한 안개마냥 무관심과 시간 때우기의 의도가 진하게 깔려 있어서였으며, 무엇보다 나의 취미가 무엇인지 곧바로 떠올릴 수가 없어서였다.


글을 쓰는 게 일이 되자 글은 내 손을 떠났다. 단어를 조합하고 문장을 다듬으며 즐거워하던 장난이 어느새 일로 치환됐고 그것은 고통으로 바뀌었다.

일을 시작하고 한동안  에세이를 쓸 수 없었다. 본래 다작을 하는 성격은 아닌데 정해진 업무시간에 무언갈 써내 뱉어야 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으니, 여유롭게 쥐고 굴릴 단어들이 사라지고 문장은 갈 길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글쓰기는 취미가 아닌 밥벌이가 됐다.


글을 잃고 나서는 스쿠버다이빙을 배웠다. 자격증 두 개를 따는데만 80만원 정도가 들었다.

국제 발송으로 자격증이 날아왔다. 세계 어디에서든 장비만 주면 혼자 40m까지 내려가도 된다는 말이 영어로 적혀 있었다.

일하면서 만든 취미는 돈과 함께 시간이 들었다. 나는 서울에 사는데 스쿠버다이빙은 바다에 가야 했다. 대한민국의 바다는 차가워서 흥미가 떨어졌고 따듯한 바다는 비행기를 타야 만났다.

나는 열심히 돈을 모아 휴가를 기다렸다. 바다에 20번 정도밖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쯤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취미를 빼앗긴 지 1년째가 된다.

 

이런 생각을 아주 빠르게 하던 나는 누가 봐도 어색하게 "하하" 하고 웃었다. 대답은 기억나지 않고 비슷한 정도의 무심한 질답이 이어졌다.

면접을 끝내듯 저녁 9시를 채우고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런 시시한 자리에는 세 시간 즈음의 시간과 적당한 에너지를 바쳤다. 변리사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연락을 주고받던 이들이 한두 명씩 곁을 떠나는 느낌이다. 친구들은 누군가와 만나는 사진을 끊임없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분기별로 연락을 주고받는 이들과의 대화 간격조차 뜸해진다. 외롭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것이 코로나 블루라는 것인지 혹은 혼자만의 침체된 감정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좁은 인간관계를 이제야 인지하고 마음의 문을 닫는 과정인지 쉽게 알아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처음 몇 명에게는 상처를 입었고 한동안은 체념했다.

이제는 같이 상처를 준다. 때로는 먼저 손을 내밀고 칭얼거리며 유대관계를 요구한다. 나에게 필요한 사람에게 매달리길 주저하지 않고, 내가 필요한 상대에겐 적당한 정도의 도움을 주면서 앞으로의 관계를 계산한다.

상처 입고 체념하던 초창기의 내 우울을 지켜보다 "요새 안 그런 사람이 어딨냐"라고 일갈했던 15년 지기 친구는 이 말을 듣더니 이렇게 평가했다.

"너, 마음이 많이 단단해졌나 보다"


나는 그것보단 타인과의 관계가 늘 아름답고 투명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또 하나의 순수함을 잃은 것 아니냐고 생각했지만, 단단해진 것이라고 믿으려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사는 건 덧붙임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추억과 고난은 저마다의 꽃잎을 남기고, 그런 꽃잎으로 겹씌워진 사람은 장미처럼 풍성하고 화사해진다는 아름다운 마음을 나는 진심으로 경외하고 사랑한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사는 건 벗겨짐이라고 생각하는 쪽에 가깝다.

젊은 날 우리를 보호하던 패기와 무모한 자신감이 가장 먼저 바스러지면, 인간에 대한 근거 없던 신뢰들이 꿈틀대다 피스타치오의 껍데기처럼 틱, 하고 벗겨진다.

당연히 내 것이라고 믿었던 꿈이나 소망, 가치와 신념, 취미나 친구들, 사랑 같은 단어를 작약 꽃잎처럼 하나씩 벗겨내다 보면 연약한 듯하면서도 옹골진 단단한 꽃심, 그런 덩어리가 남는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그릇, 됨됨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다.

그러니 사는 건 잃어가며 스스로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늘 성장해나가야 할 뿐이다. 꽃잎을 잃는 과정 역시 어쩌면 남은 꽃심의 응집력을 더욱 단단하게 해주는 자양분이 되는 과정일 것이라고,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나는 막연히 믿는다.


사실은 방황하는 내가 그렇게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취미를 잃는 대신 잠시의 여유에도 감사할 줄 아는 소박함을 가질 수 있기를.

처음 만난 낯선 상대에게서 호감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타인에게서가 아닌 나 스스로에게서 빛나는 지점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계기로 이어지기를.

친구라 믿었던 이들의 손을 놓는 대신, 진정한 동지를 선발하며 또 누군가에게는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기를.


그렇게 나는 매일 잃으면서, 나이테같은 꽃심을 피워내고 싶다.



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곳의 모든게 나와는 상관이 없어.

이제 깨달았지

이 거리에서 내 몫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소중했던 것이 이렇게 버려질 수 있나.

누군가에게 내 맘을 털어놔도 답답한 기분이 가시질 않네.


알 수 없는 세상이 나에게 너는 아무도 아니라고.

믿을 수 없는 말을 나에게 해봐도

난 절대로 믿을 수 없어

인정할 수가 없네.


이전 06화 불협화음으로 젊음을 빌릴 수 있다면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